강진숙<수필가>
남한강 물안개가 그리워. 미처 어둠을 떨구지 못한 새벽, 성에 낀 차를 시동걸때면 그는 종종 물안개 얘기를 했다. 남편은 한국을 떠나기 전 어느 가을, 계곡 산장에서 함께 바라본 새벽 물안개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지난겨울 처음 이 집을 보러오던 날, 나는 새삼 그의 안개타령을 떠올렸다. 이미 새벽녘에 비는 그쳤지만 계곡중턱의 콘도단지는 정오가 다 되도록 짙은 운무에 잠겨있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굳이 정든 도시를 떠나온 내 치기가 결코 그를 잊으려는 모진 몸짓이 아니었다는 걸.
글쎄 나도 안쓰러운 언니 마음 알아. 또 궁극적으로 우리모녀에게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그래도 지혜아빠 떠난 지가 얼마나 됐다고...
평소 연락이 뜸하던 선배는 내가 사별을 하자 일주일이 멀다고 장거리전화를 걸어왔다. 그 훈훈한 마음씀이 고마워 작년 말에는 아이와 함께 그녀가 사는 뉴욕까지 다녀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선배는 내게 슬슬 재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새 출발하는 게 얼마나 어렵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웃들은 남편 없는 여자의 고독을 더 걱정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권유보다 더 큰 유혹은 내 안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잠결에 무심코 텅 빈 옆자리를 더듬던 밤, 나는 단지 남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 좋아, 언니. 그렇담 누구 봐둔 사람이라도 있어? 내가 짐짓 백기를 드는 척 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오빠 얘기를 꺼냈다.
얘, 아무래도 감이 너무 좋아. 이제 말이지만 난 사실 네가 그 도시로 이사갈 때부터 온몸에 전율이 다 일더라. 그 많은 도시 중에 하필이면 왜 거기냐 말이야... 그나저나 너 예감 같은 것 믿니? 선배의 말이 갑작스레 빨라졌다.
예감? 나 또한 미신이 아니라 일종의 계시로서 예감에 꽤 민감한 편이다. 물론 예감이란 단지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신기루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들 그에 초연할 수 있을까. 실제로 지난날 내 결혼, 이민, 그리고 비즈니스 선정을 주도했던 건 혹여 이성보다는 예감이었는지 모른다.
얘,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너랑 오빠를 짝지어보고 있는데 우리 뒤뜰로 사슴 한 쌍이 내려오는 거 있지. 이 집에서 7년째 살고 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거든. 순간 두 사람이 꼭 맺어질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스치는 거야. 게다가 수컷은 제법 뿔이 수려하더란 말이야. 그리고는 이어 혼자 사는 오빠의 자랑이 이어졌다.
사실 내 재혼에 관심을 갖는 건 단지 선배언니만이 아니다. 이사와 새로 출석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얼마 전 신방을 오신 목사님은 아예 우리 한 번 노력해봅시다. 라며 재혼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셨다.
급기야 지난주에는 새로 시작하려는 싱글사역을 의논하고 싶다며 예배 후 나를 사무실로 부르셨다. 그런데 그 싱글사역이라는 게 처녀, 총각을 배제한 과부, 홀아비, 이혼남녀 등, 이른바 ‘돌아온 싱글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리고는 나이도 적당하고 또 교인들과도 빨리 친해지는 길이니 내가 적극적으로 그 일을 돕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뭐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위로나 돌봄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성공적인 사역은 짝을 맞춰 싱글을 벗어나게 해주는 거죠. 게다가 함께 일할 분도 있으니 부담도 덜하고... 목사님의 얼굴에 제법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치는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집사님. 먼저 인사 나누세요. 이쪽은 근래 우리교회에 등록하신 임정희씨입니다. 교인수가 많다보니 서로 초면이지 싶은데...
팀장을 맡게 될 거라는 이집사와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5분쯤 목사님의 사역플랜을 듣다가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우기를 막 지난 3월의 날씨는 민망하도록 화창했다.
‘고맙게 생각하자, 나를 염려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걸.’ 영 내키지 않는 걸 선배언니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약속을 잡은 게 화근이었다. 분명 설렘은 아닌 것 같은데 아침부터 가슴이 내내 두근거린다. 게다가 그간 스스로 밝은 옷을 피해왔던 탓에 갑자기 무엇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큰맘 먹고 입어본 하늘색 수트는 몸에 착 달라붙지 않고 겉돌았다.
새삼 무슨 청이든 거절을 못하는 내 성격을 원망하며 서둘러 차를 모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선배였다. 임정희 파이팅! 평소에도 나이에 비해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통통 튀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카페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미국사람들 남의 일에 관심 없는 걸 잘 알면서도 감히 구석구석 찾아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차피 중년의 동양남자면 충분하다 싶어 그 사람의 특징 같은 건 아예 묻지도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재빨리 구석자리를 찾아 앉았다.
실례합니다, 임정희씨. 저음의 남자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집사님... 갑작스런 이집사의 출현에 한순간 뿌연 혼란이 일었다.
‘가만 있어보자, 오늘이 싱글들 첫 미팅이 있는 날인가? 저 양반이 왜 여기 와 있지?’ 그렇게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벼락치듯 어떤 느낌이 스쳤다.
그럼, 집사님이 현정언니 오빠세요?
동생이 제 이름을 말할 때 별 관심 없으셨죠? 저는 지난 월요일 동생 전화를 받자마자 감을 잡았는데... 미리 알려드리려다 놀라는 모습 한 번 보고싶어 그냥 나왔어요.
다행히 화제는 궁하지 않았다. 선배언니, 그리고 싱글사역 등을 얘기하며 점심도 함께 나눴다. 만나러 갈 때보다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오며 차에서 선배에게 전화를 넣었다.
언니, 세상 참 좁더라. 우리 두 사람 초면이 아닌 것 있지... 어머나! 언니, 나 지금 우리 콘도 앞인데 수사슴 한 마리가 게이트입구에 떡 버티고 서있네. 나만 똑바로 쳐다보고 꼼짝도 안 해. 언니, 이따 집에 들어가 다시 전화할게... 알았어, 알았다구, 글쎄 예감 얘기도 이따 하자니까.
선배의 표현 마냥 버텨선 사슴의 뿔이 제법 수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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