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 그러면서도 기대감 비슷한 게 없는 것도 아니다. 가만 있자. 오늘은 누가 잡혀갔나. 아무개 의원이 체포됐다. 몇 명 째인가. 얼마라고. 1억원 정도야. 더 거물이 있을 텐데….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을 포함해 16명의 정치인이 구속됐다. 273명의 국회의원 중 33명이 부패혐의로 기소됐다. LA타임스 보도다. 몹시 놀랐다는 인상이다.
하기야 부시 대통령의 측근들이 죄다 체포됐다고 생각해보자. 게다가 연방상원의원이 12명쯤 구속되고, 뉴욕시장은 자살을 했다. 주지사에, 연방하원의원까지 합쳐 100여명이 체포됐다고 치자. 어떤 일이 날까.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정치인 떼거리 구속사태. 절대 예삿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충격도 전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이 된 느낌이다. 잘하는 일이다. 썩은 기득권층 같으니라고. 갈채가 들리는 것 같다.
중얼거리다 보니 뭔가가 이상하다. 그 흐름 속에서 감지되는 게 있어서다. 그렇지만 가뭇가뭇하다. 그 실마리가 잘 잡히지 않는다. 그게 뭘까.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지평선 너머에 형성된 구름 층. 아직은 식별이 잘 안 된다. 그건 다른 게 아니다. 부패다. 부패의 글로벌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새 밀레니엄, 새로운 세기에의 희망에 들떠있던 2000년 벽두 뉴욕타임스에 실린 담론이다. 그 결론은 이렇다. 부패와의 전쟁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쟁이 될 것이다.
이런 경고도 나왔다. 만연하고 있는 정치 스캔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과거 공산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검은 돈’의 출처를 숨기려는 ‘돈세탁’이 연간 54조∼169조원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같은 무렵,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2000년 1월18일에 한국에서 발표된 보고다.
90∼98년의 검찰 수사사건을 중심으로 분석해 얻어낸 수치로, 96년 국민총생산의 9.1∼28.2%에 이른다는 분석이었다.
90년대의 ‘검은 돈’ 백서, 그러니까 IMF사태를 가져온 문민시대의 정치비리 백서가 발표 된지 얼마 후 또 다시 비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아예 시리즈로.
‘게이트’자가 붙는 스캔들의 연속이다. 그게 얼마 전 이야긴가. 그런데도 한국사회의 지배적 화두는 여전히 부패다. 그리고 벌어진 상황이 정치인 떼거리 구속사태다.
4년 전 부패의 담론, 그 예언이 적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런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보면 필연의 흐름이다. 부패는 21세기의 글로벌한 현상이고, 그 부패와의 전쟁은 시대적 요청이고 하니까. 과거 기득권층의 엄청난 도덕적 해이(解弛), 그 구정물을 청소한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래, 그렇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다 보니 가뭇하기만 하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다.
부패와의 싸움이다. 대의명분은 그렇다. 그러나 교묘한 덫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부패척결을 외치는 논쟁 속에 치밀한 계산이 엿보여서다.
모든 것이 이분법으로 나뉘어 진다. 이 구도에서 기득권층은 무조건 부패한 무리다. 그 부패한 무리는 또 바로 친미주의, 아니 숭미(崇美)주의자 집단으로 치부된다. 개혁대상이란 말이다.
그리고 결코 말실수가 아닌, 의도된 발언으로 애드벌룬을 띄운다. 자주국방이다. 천도론(遷都論)이다. 여기에 교묘한 함의가 들어있다. 한국 현대사의 전면적 부정이다. 강력한 반미다. 지배세력 교체의지다.
보수나 진보 사이의 선의의 경쟁관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 이분법적 분류의 흐름 속에는 노무현 정권의 혁명적인 이념 코드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추기경에 대한 공격이다. 어두운 시절 양심의 보루였다. 한국 사회의 마지막 권위인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 권위를 왜 철저히 부숴야 했을까. 한 386 실세의 말이 갑자기 떠올려진다.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총칼을 휘두르며 한강 다리를 넘었다면 우리는 노란 머플러를 휘날리며 한강 다리를 넘었다.”
그 비유가 뭔가를 시사하는 것 같다. 일종의 쿠데타적 발상이다. 왜 권위를 부숴야 했을까.
다시 큰 그림을 보자. 한국의 총선은 무엇인가. 여·야 의석수 싸움이자, 덜 썩은 정치집단 고르기 경연대회다. 표면으로는 그렇다. 내면에 있어서는 그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좌표를 새로 정립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은 혹시 아닐까. 잇단 이념과잉의 섬뜩한 발언에서 문득 그런 게 느껴져 하는 말이다.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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