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휘(소설가)
미스터 김, 무엇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어깨를 탁 치는 박사장의 소리에 김은 와들 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평소 침착한 성격은 어디로 가고 이런 행동을 하는 김을 박 사장은 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니, 이 사람. 왜 그렇게 놀라? 점심 먹으러 안가?
아, 네. 먼저 가세요. 이것 마저 해놓고 가죠.
순영씨와 버그너가 안 나오니 사무실이 너무 쓸쓸한데.
사장님. 버그너 오후에 나오죠?
글세 나온다고 했으니 나오겠지. 왜?
무엇 쫌 물어 볼까 해서요.
배고프면 헛소리 나오니까 밥 먹고 물어봐.
김이 무어라고 대답하기 전 사장은 벌써 문을 열고 나아갔다.
사람이 물건을 받았으면 전화 확인이라도 해야지. 왜 아무런 말이 없을까.
김이 의자에 앉아 펜을 잡을 때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김은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본다. 김은 보통 열 한 시경 되면 우편배달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은 배달이 늦게 왔나? 물어보면 일단 모른다고 해야지.’ 김은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음성은 소프라노의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아니었다. 컬컬한 음성은 박 사장을 찾고 있었다. 김이 소포를 보낸 지 5일 되었다. 그런데 아무런 질문과 반응이 없다. 물론 발신인은 익명으로 했다.
김은 지금까지 술에 물 탄 것인지, 물에 술 탄 것인지 애매 모호한 성격으로 생활해 오고 있다. 그런 성격을 바꿔 보겠다고 몇 번 마음을 먹었지만 아직 한번도 실천에 옮겨보지 못했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도, 노래방에 가도, 가정에 돌아와서도 별 변화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 밖에서 활발하면 가정에선 소극적이고, 가정에서 자상하고 따듯한 성격이면 밖에선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들 했다. 그런데 김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아내가 얼마나 속이 타고 있을까. 김은 40대 남성의 의욕적이고 화끈한 멋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속도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구고 싶었다. 그동안 미루어 온 내부의 변화를 시도해 볼 생각으로 먼저 아내한테 소포 하나를 보냈다. 그런데 지금 아무런 반응이 없다. 김은 인터넷으로 들어가 여자한테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기사를 밤늦게까지 찾아 읽었다. 김은 이번엔 다른 물건을 사서 보낼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백화점을 찾았다.
김은 여자 속옷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그 사이로 걸어간다는 것은 묘한 감정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부부가 길을 걷다 매력적인 남성을 봤을 때, 부인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 관능적인 여성을 봤을 때 고개를 돌리는 남성. 이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기사를 읽고 김은 자신의 반란에 더 큰 용기를 가져다. 김은 미국 여자 점원한테 사이즈와 색깔을 이야기하면서 여름 들판 길가에 핀 패랭이꽃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 금발의 여인은 김의 위아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묘한 웃음을 짖고는 저쪽 서랍이 많은 쪽으로 간다.
여자들도 저런 야한 옷을 입고싶은 욕망이 생기겠지? 김은 눈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서 백화점 천장을 바라보면서 점원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은 아내를 만나 2년 간 데이트를 하다 결혼을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데이트하면서 키스 한번도 못해봤고, 손잡고 거리도 걷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이 사람이면 나를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아내 앞에선 수줍어하고 있다. 한번은 아내가 남편의 수줍음을 해소하고 자극을 주고싶은 마음에서 샤워하고 나와 남편 앞에서 타울을 내리면서 자기를 한번 봐 달라고 했다. 김은 아내를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런 사람이 내부의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김은 우체국으로 갔다. 익스프레스 봉투 속에 백화점에서 산 물건을 넣었다.
이 우편물 언제쯤 받아 볼 수 있죠?
내일이면 도착합니다.
김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하루종일 아내한테서 전화가 없었다. 3번이나 소포를 보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 김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정신상태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김이 퇴근해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식탁 테이블 위엔 메모 한 장이 있었다.
갑작스런 일이 있어 명희 집에 갑니다. 찰리는 큰집에서 내일 학교로 간다고 했습니다. 있다 전화할게요.
김은 방에 들어가 옷을 바꾸어 입고 나오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보낸 물건을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화장대 서랍 위의 것을 열었다. 거기엔 겨울옷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 다음은 여름옷. 제일 밑 서랍을 열었다. 한쪽엔 아내의 속옷과 그 옆으로 계절에 따라하는 스카프가 놓여 있었다. 맨 위엔 김이 사서보낸 가을의 단풍 속에 집이 그려진 스카프가 있었다. 그 옆엔 검은색 브래지어, 핑크 색 스트립 팬티도 있었다. 이렇게 다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 보통 여자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한테서 무슨 물건을 받으면 남편한테 그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김의 아내는 어찌 아무런 내색이 없을까? 김은 직접 물어 볼까하다 그만 두었다.
사람이 생활의 방식을 전환해 본다는 것이 이렇게 힘드는 일 인줄 김은 몰랐다. 사람이 살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도 힘들고,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힘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은 타고나면서 그 사람의 성격을 가지고있고 또 성장해온 환경에서 형성된 성격을 바구어 본다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은 소포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전처럼 그냥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에서 막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저 예요. 집에 없어서 미안해요. 여보 저에게 보내준 소포 다 잘 받았었어요. 갑작스런 당신의 행동에 저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여보 이제 우리도 한번 뜨겁고 멋있게 살아봐요. 당신의 그 변화되려고 하는 마음 정말 고마워요. 지금 출발해요. 여보, 사랑해요.
그래 우리 한번 용광로 속처럼 살아보자.
김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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