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리빙룸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면서 요즈음 인기 절정에 있는 연속극 ‘완전한 사랑’을 보고 있다.
나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 내 방으로 건너와 책을 보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면서 슬쩍 남편을 보니 이제는 아주 마음놓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
남자들은 보통 슬픈 영화를 보지 않는데 그는 일찍 세상을 뜬 옛 아내의 과거를 더듬는 듯 드라마에 몰두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왜 우리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가!
지난 달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칠십세된 백인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같은 회사 직원들과 함께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솔직히 그 분위기에 놀라고 말았다.
고인의 장남이 문 앞에서 조객들을 웃으면서 맞이하는가 하면, 조객들도 마치 잔칫집에 온 것 같이 착각을 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장례식 순서도 짜여 있지 않고 조그마한 종이에 고인의 출생 날과 마지막 날이 적혀 있는 정도였다.
목사님의 설교는 오분을 넘기지 않은 듯했고 중간 중간 흑인 여자가 열성을 다해 부르는 세 번의 조가는 듣는 모든 조객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서는 고인의 옛 친구의 회고였다.
고인과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가 된 마지막 날까지 그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웃겼다. 솔직히 장례식에서 그렇게 웃는 사람들을 본적이 없는 나는 그 날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차에 동승했던 직원들도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저렇게 살다가 죽을 수만 있다면…”하면서 한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 충실한 가정의 가장으로, 직장에서는 보배 같은 존재로, 사회적으로도 덕망을 쌓아온 그의 삶을 부러워들 했다.
한때 지인의 장례식장에 가서 울지 않던 때가 있었다. 삶이 너무 힘들어 내일 눈을 뜨고 싶지 않아 스스로 죽기를 갈망하면서 유서 같은 일기를 쓰던 시절이었다.
그때 죽음을 보면 아무 고통 없이 편하게 누워 있는 자가 부럽기까지 하여, 고인의 시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잘 가소서.” 한마디하고 돌아서곤 했다.
사업은 무너지고 이십년을 훨씬 넘게 함께 살던 남편과의 관계도 날로 악화되어가면서 인생의 마지막 바닥까지 내려갔던 나는 죽음도 용기가 없어 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같은 혹독한 시련을 격은 후 어느 날부터 내게는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오직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명랑하게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오면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로 여기고 기꺼이 가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성탄절에는 남편과 자녀들에게 과거보다 좀 괜찮은 선물을 마련했다. 가족이니까 이해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소홀히 했던 그동안의 일들을 반성하면서 처음으로 여러 날 동안 가족을 위한 선물을 사러 다녔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포레스트론’에 잠들고 있는 가족들을 찾아갔다. 소리 없이 늘어나는 가족들의 비석을 보면서 그들에게 다하지 못한 말들 때문에 가슴이 저며왔다.
특별히 엄마가 내게 베푼 사랑이 너무나 큰데도 나는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만 남아있어, 살아생전에 “엄마 사랑해요”란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보냈다. 엄마의 시신이 땅속으로 내려갈 때 겨우 “엄마, 날 용서해줘요”라고 울부짖었다.
떠나간 자는 말이 없다. 살아남아서 더 이상은 자책하지 않고 내 자신이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더 사랑할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는 슬퍼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떠나간 자들을 잊어버리고 욕심스레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날까지 사랑의 씨앗을 매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씨앗이 내 이웃에게도 번져 행복한 향기가 여기 저기 사방으로 흩어지면 좋겠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나는 밤이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학신
<약력>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순수문학 수필 당선
▲캐나다 뱅쿠버 문인협회
공모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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