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평범하게 사는 한 후배의 집에 갔더니 그의 아내가 그린 풍경화가 방마다 벽마다 넘쳐있었다. 그녀가 오랜 동안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명랑함을 잃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거실에는 집보다 커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며 유명한 지휘자의 사진들 그리고 하키 우승 트로피가 즐비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아들의 것들이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아들이 강해지라고 운동을 시켰고 음악을 즐기며 살라고 트럼펫과 피아노 공부를 시켰다는 것이다. 15년 전 그 집을 방문한 기억이 났다. 그 때는 ROTC 동지회에서 신입 회원 집마다 찾아가 힘내라고 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주었다. 나무를 심고 임원들은 그녀의 정갈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 나무가 자라서 다른 나무들과 함께 언덕 위 그 집을 받쳐주고 있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밤마다 카바레에서 음악연주 했던 친구가 경제학과 졸업여행에서 손풍금을 연주했을 때 함성을 지르며 열광한 것은 뛰어난 음악성 뿐 아니라 우리들이 편하게 보낸 학창시절을 그는 피나는 고생으로 보낸 감동 때문이었다.
키도 작고 상업학교를 나온 동료가 은행에 중창단이 생기자 기타로 반주하고 작곡하고 노래했다. 어디서 제대로 음악 지도를 받은 적도 없단다. 저녁이면 지점에서 계산을 마감하고 남들은 집에 가기 바쁜데 그는 본점으로 기타를 들고 와서 중창단의 화음을 넣었다. 멤버 중 하나가 그 시절에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이민을 떠나던 날 우리들은 김포공항 잔디밭에 서서 바닷가에서를 노래했다. 눈을 감고 기타 칠 때의 그는 바다같이 넓고 커 보였다.
평소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타는 수학과 출신 동문이 동창회 날 슬며시 피아노에 앉더니 슈베르트 곡을 악보도 없이 연주 할 때는 시끄럽던 그 넓은 집안에 기침소리 하나 없었다.
서울 울바우 남성합창단의 공연 테이프를 받은 날 나는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법대를 나와 직장을 다니며 명동성당 합창단을 시작으로 40년째 지휘 해온 상호형 때문이다. 그는 중년의 내 친구들과 주말에 모여서 합창을 한다. 그 친구들을 만나면 잘나가던 직장에서 명퇴 되어 축 늘어진 모습과는 상관없이 성가 곡에 한해서는 생기가 돌았다.
육군 경리학교 내무반에서 밤마다 클래식 기타를 쳐 동료들을 감동시키던 도성이를 작년에 30년 만에 서울에서 만났다. S대학 경제학 교수였다. 전방으로 내게 기타까지 사 보냈던 그가 이제는 기타 치기를 고만 두었다고 했을 때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기타를 위해 길렀던 손톱을 짜른 것도 머리 짤린 삼손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일들을 다 미루고 만났으면서도 대화의 빈곤으로 금방 헤어졌다.
남들은 L회장의 성공담, 재력, 재산의 사회 환원 등에 감탄하지만 나는 그분의 엄청난 독서열, 책으로 덮인 서재를 들여다보았을 때 놀랐다. 해박한 식견 앞에 그분의 재산은 스쳐 가는 인연처럼 보였다. 독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위진록 수필가가 LA에서 한국 책방을 열었을 때 책을 듬뿍 사가는 이들은 뜻밖에도 페인트가 옷에 묻은 사람, 힘든 일들을 하다가 피곤해진 모습으로 집에 가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그 감동을 글로 담은 적이 있다.
책과 생활하는 그래서 생각과 생활이 반듯한 C박사, 같이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친구는 오래 전 미국대학 유명교수가 되었지만 중도에 전공을 버리고 현대문학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책 속에 파묻혀 사는 C평론가, 대대로 성직자이면서 밤 깊도록 시상(詩想)의 세계를 거니는 Y목사,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가슴에 샘을 하나씩 지니고 사는 거다.
<데미안>의 작가이며 노벨상 수상자 헤르만 헤세, 그는 인생의 절반을 그림 그리며 살았다. 자신을 화가라고 생각 한 적도 없었고 그렇게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내적 답답함을 풀기 위한 명상행위였다. 수채화의 주옥같은 명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능력이나 탁월한 예술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속에 무엇을 지니고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림 그리려는 시도가 나를 위로하고 구원하지 못했다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 그는 고향에서 알밤을 주어다 배를 채우며 자연을 그렸다. 힘들 때 그림 그리기로 현실을 잊고 극복했으며 현실 뒤의 이상 세계를 표출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작가로서 보다 아마추어 화가로 더 존경한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가 걱정하는 것 중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걱정이 40퍼센트, 이미 지나버린 게 30퍼센트 상관없는 게 12퍼센트 상상 혹은 병에 의한 게 10퍼센트, 정말 걱정 해야할 만한 일은 8퍼센트라고 한다. 어디엔 가 숨겨져 있는 당신의 옹달샘만 찾아낸 다면 8퍼센트마저 깨끗이 치유시킬 수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