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였던 선조임금 때 인동현감을 지낸 이등림, 그에게도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가방 한 개 들고 백악관에 들어갔다가 임기를 마친 후 달랑 그 가방 한 개 다시 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얘기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이등림은 임기가 끝나 인동현을 떠날 때 부임당시 가져오지 않았던 물건이 끼어있을까 하여 이삿짐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그런 물건이 없어 안심하고 마을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마악 고을 어귀를 빠져나올 때 한 하인이 새 짚신을 한 켤레 가지고 있는걸 보았다. “거 웬 짚신이냐?” 하인이 대답하기를 “다 떨어진 제 짚신을 보고 가다가 바꾸어 신으라고 아전이 주었습니다.” “아전에게서 얻었다면 그것도 관청의 것이니 저기 보이는 저 바위위에 걸어놓고 오너라.” 그 일이 있은 후 고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신걸이 바위>라고 불렀다. 관리들은 그 바위에 <괘해암>이라 새기고 짚신이 걸렸던 내력과 이등림을 칭송하는 명문을 아울러 새겼다. 마지막 두 연은 이렇다. <이 바위가 삭아 없어지지 않는 한/ 길이길이 남의 본이되리라>
이 괘해암은 지금도 경북 구미시 진평동 마을 입구에 서있다. 해방 이후 조국이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선 건 아슬아슬한 행운이었다. 조국의 다른 반쪽을 생각하면 당장 수긍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도 가지가지인지 제대로 된 민주주의 하기가 이렇게 험난한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 해방둥이 세대가 내일 모레면 환갑이 되도록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아직도 멀고 먼 것 같으니 말이다. 어느 시대나 탐관오리는 있었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얘기다. “행여나” “이번에는”- 했던 젊은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고 감사원장에 대법원장까지 지내면서 대쪽에 비유되던 야당의 지도자는 한 술 더 떠 돈을 트럭으로 받고도 대쪽소리 듣는데 낯빛 한번 변하지 않았다니 이 국민적 허탈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이 고려 때의 노극청을 비롯해서 조선조의 안성, 정이주, 연산조의 박한두, 중종 때의 안탄대 등 양사지국(養士之國)을 뽐내던 이들의 후예란 말인가. 헌법에만 민주주의라고 해놓으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는가. 자구(字句)만 그럴듯하게 고치면 개헌이고 개헌만하면 민주주의가 쑥쑥 자라는가?
신문을 읽던 그이가 대갈(大喝)한다. 요즈음 시청률이 꽤 높은 연속극 대장금에서 한상궁이 죽게 되었다고 하자 극중의 한상궁을 살려내도록 대본을 고치라는 목소리가 높다가 드디어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친다더니 이게 이루어지지 않자 급기야는 인터넷에 상청을 만들고 조문객을 받기도 한다는 얘기를 전한다. 이 소릴 듣고 기가 막혀 이 글을 쓴다. 밤낮 해보아야 너도나도 모두 비슷비슷한 소리, 어느 논설가나 칼럼니스트, 아니 일반 독자들도 다 잘 아는 그 얘기가 그 얘기이라 같은 글을 써야하는 나 자신 곤혹스럽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또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민의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정치인을 아무리 탓해봤자 소용없으니 이제는 정치인을 탓하기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방치하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려보고 싶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교통법을 위반하고 길에서 상대와 주먹질을 하고 싸우는가? 교통순경에게 돈을 집어주는가? 아이의 석차를 올려달라고 선생에게 뇌물을 갖다 주는가?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왜 거기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다. 민주주의시대의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주인의식 없고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랄 수도 꽃피울 수도 없다는 것을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연속극 대본을 바꾸라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일 기운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자는 서명운동을 펼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길이 한 나라의 성숙한 국민이 되는 길 아닐까? 큰 도둑들이 나라를 그나마 거덜 내기 전에. “아직 힘이 있을 때 뉘우치는 것이 좋다.”고 탈무드도 말한다. 연속극 대본을 고치라고 100만인 서명운동이라니! 참으로 치기어리고 부끄럽다. 한 인간에게 인격(人格)이 있듯이 나라에도 국격(國格)이 있다고 한 건 소설을 쓰는 어느 작은 여자였다. 나도 그 말이 하고 싶다. 위에 든 이야기처럼 정치적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조국이 보고 싶다. 나만의 꿈일까? 그게 지금 조국의 위정자만의 잘못일까? 그런 위정자를 기른 국민들의 잘못은 아닐까? 괜히 오늘 아침엔 조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민이 간다.
<시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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