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선 <본보편집위원>
새해 벽두 부시대통령이 모든 이민수속을 획기적으로 앞당기겠다고 한 공약은 분명 ‘굿 뉴스’다. 한인사회 입장에서도 매우 반가운 소식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실천되기를 대부분 기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반응들은 영 신통치 않다. 국토안보부가 곧바로 부시의 그런 공약을 구체화시키는 정책까지 발표했음에도 사람들은 어찌 심드렁하기만 하다.
듣기는 좋아도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강한 의구심의 표출이다. 더 솔직히 표현하면 대통령 선거를 앞둔 부시정부의 ‘립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사람들의 그런 불신은 지난 3년간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부시대통령은 3년 전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같은 공약을 했다. 지역적으로 불규칙하게 진행돼 온 이민서류 수속기간을 6개월로 통일시키고 이를 위해 5년간 총 5억달러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정반대로 진행돼 왔다.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예산은 오히려 축소됐고 따라서 관련 직원들의 증원도 실천되지 못했다. 자연 부시의 ‘6개월 서류수속’ 공약은 흐지부지된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황이 개선되지는 못해도 악화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이민자에 대한 각종 차별과 규제가 대폭 강화되고 이민수속 적체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이민자에 대한 증오범죄와 인권침해도 심각하다.
이로 인해 미국 내 선량한 3천3백만 이민자들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엄청나다.
비록 9.11테러에 따른 여파 때문이라지만 그들이 테러와 무슨 연관인가. 테러는 몇몇 안 되는 빈 라덴과 그의 조직원들이 일으킨 것이지 대부분의 미국내 이민자들은 그들과 무관하다.
테러는 몇몇 테러범들이 저질렀는데 피해는 선량한 이민자들이 보고 있다. 당하는 이민자들은 기가 막힌 일이다.
이민자들은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며 인내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3D업종에서 힘들게 일하며 꼬박 꼬박 미국정부에 세금을 낸다.
미국인들은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주장한다.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민자들이 미국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에 비해 너무나 하찮은 것이다.
한마디로 이민자 없인 미국경제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다. 그들 없는 미국사회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들이 없다면 이 넓은 대륙의 농사는 누가 지어 미국인들의 먹거리를 조달할 것인가. 누가 힘든 막노동으로 집을 지어 미국인들의 안락한 주거시설을 마련해 줄 것인가. 누가 더럽고 지저분한 청소를 도맡아 미국인들의 쾌적한 사무실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미국인들은 이제 그런 일을 못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미국인들은 미래의 미국인인 이민자들에 감사해 해야 한다. 감사까지는 않는다 해도 지금처럼 무시하고 힘들게 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아직 미 주류가 이민자들에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부 미국인들의 감정적인 대응과 왜곡 그리고 무지에 따른 것이지, 이민자를 포용하는 미국의 기본적인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부시의 이번 이민수속 단축 재공약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싶다. 비록 재선을 의식한 전략적인 정책이라고 해도 9.11테러 이후 악화 일로에 있는 반이민 정서의 물꼬를 되돌리는 선언적 의미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의 공약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되면 되고 안되면 말고’ 식의 공약(空約)은 미국 사회 전체에는 물론 부시의 재선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부시의 공약이 실천되려면 부시의 재선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부시가 재선되지 못할 경우 새 대통령이 부시의 공약을 실천한다는 보장이 없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산확보나 입법과정에서 의회나 여론의 협조 없이는 공약의 구체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또 다른 테러가 일어난다면 ‘언제 그런 말했느냐’는 분위기로 돌변할 수도 있다.
부시의 이번 공약에 이민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선언적 의미에서 장기적인 공약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이민수속 적체 해소다. 현재의 실천이 없이는 미래의 실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한가지 실천이 더 소중하다. 부시대통령이 진정 재선에 성공하고 싶다면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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