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무심코 핑크 빛 립스틱을 집었다 심란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도루 내려놓았다. 오늘 외출의 목적이 무엇이든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화장도 좀 화사하게 하고, 작년 봄에 사놓고 아직 개시도 못한 실크 원피스도 한 번 입어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를 돌보느라 지난 일 년 동안 남편과 외식은커녕 변변한 외출 한 번 못하고 지낸 터였다.
영인아, 이러다 참말로 죽고 싶어 그려? 어여 먹어, 고집피지 말고. 입맛 없어도 한 술 떠봐... 막 스타킹을 신으려는 참에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사실 아까부터 어머니 방에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어도 적어도 화장이 끝날 때까지는 그냥 무시하고싶었다. 보나마나 또 억장이 무너지는 장면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장롱 거울에 비친 당신 모습을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계셨다. 아니, 고함뿐 아니라 수저 가득 밥을 퍼서 거울 속 당신에게 억지로 쑤셔 넣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내 쪽을 돌아보시더니, 황소고집이여. 아무래도 이 화상이 아예 굶어 죽을 작정을 한거여. 내처 부화를 내셨다.
엊그제도 어머니는 거울 속 당신과 삿대질을 해가며 큰 소리로 싸우셨다. 진정하시라는 내 말에 저 여편네가 바로 서방 뺏은 년이라며 되레 내게 역정을 내셨는데 그때 그분의 눈에 서린 노여움은 정말이지 섬뜩했다. 지금까지 며느리가 밥을 굶긴다며 억지를 부리실 때나, 혹은 방안 구석구석에서 손수건에 싼 썩은 음식이 나왔을 때도 그런 막다른 느낌은 아니었다.
생각하면 이런 몹쓸 병이 들기 전의 시어머니는 얼마나 당차고 깔끔하셨던가.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는 어려워도 실상 그분은 누구보다도 속정이 깊은 분이셨다. 사실 당신의 그런 넉넉함이 아니라면 형님처럼 얌체며느리랑 그 긴 세월을 큰 불화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게다.
평소 맏아들내외의 사람됨을 잘 알면서도 어머니의 장남 챙김은 유별났다. 그분은 둘째인 남편과 셋째 아들인 서방님은 학교만 졸업시켰을 뿐, 당신이 갖고 계신 모든 재산을 함께 사는 큰아들에게 물려주셨다. 그래도 큰동서는 걸핏하면 시어머니 안 모시고 사는 둘째, 셋째 며느리는 무슨 복을 탔냐며 쌜쭉거렸다.
그런 형국에 재작년 어머니 병환이 치매로 밝혀지자 형님은 거의 이성을 잃었다. 물론 처음부터 심각한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치매환자의 여러 사례들을 익히 들어 알고있는 형님은 미리부터 사색이 되셨다. 가족회의 끝에 일단 1년씩 돌아가며 모시기로 하고 그 이후는 그때 가봐서 결정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큰댁에서 모신지 8개월쯤 지났을까? 시숙의 요청으로 갑작스레 가족회의가 다시 소집되었다. 40대 후반인 당신 와이프가 오십견이 일찍 와서 어머니를 마저 모시기가 힘들다는 요지였다. 부잣집이라 파출부가 매일 출퇴근을 하고 게다가 간간이 간병인 까지 쓰면서도 끝내 어머니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사실, 깜빡깜빡 당신의 신분을 잊으시는 것과 지난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 하는 것 외에는 그때까지 별다른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 남편이 누군가.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천하의 효자가 아닌가. 시숙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음날로 대뜸 어머님을 우리집으로 모시고 왔다. 내게 의논 한 마디 없이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하는 남편이 다소 원망스럽기는 해도 기왕에 모실 예정이었으니 나 역시 큰불만 없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갑작스레 뒤바뀐 환경 탓인지 우리집으로 모신 이후 어머니 병환이 급격히 악화된 데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억을 잃어 가시더니 언제부턴가는 당신 아들조차도 못 알아보시고 마치 손님 대하 듯 하셨다. 퇴근해 오는 아들에게 안녕하시냐며 꾸벅 인사를 하던 날 남편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런 형편에 며칠 전 남편의 입에서 먼저 어머니 거취 얘기가 나오자 나는 내심 뛸 듯이 기뻤다. 내게 할당된 일 년 말고도 몇 개월을 더 모신 입장이지만 나 역시 야박하게 손아래 동서에게 어머니를 보내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제법 심각한 데다가 아직은 젊은 동서가 과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형님과 의논해 차라리 고급 노인전문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경제적인 부담을 세 집이 함께 나누기로 합의한 다음에야 겨우 장남의 허락이 떨어졌다.
여보, 여기요.
식당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는 남편의 모습이 오늘따라 어쩐지 초췌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도 지난 일 년간 부쩍 늙은 것 같다.
맛있는 것 시켜서 든든히 먹어. 기왕 나온 김에 어머니 모실 병원 몇 군데 함께 둘러보자고. 남편의 말에 힘이 없었다. 든든히 먹어야 될 사람은 되레 남편 같았다.
한참을 고개 숙이고 묵묵히 밥만 먹던 남편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내게 물었다.
영인이라고 하셨다고? 거울 속 당신이랑 싸우던 그날도, 또 오늘 억지로 밥을 떠먹이면서도 굳이 영인이라고 하셨단 말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은 밥 먹던 수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의아해하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불쑥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거울 속에서 영인이 친엄마를 보신 거야.
아니 친엄마라니... 그럼 서방님은 어머니가 낳으신 아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다섯 살 무렵 어느 날, 내게 작은어머니라고 불리는 여자가 불쑥 우리 집안에 들어왔지. 목이 길고 고상한 타입이었는데 들어와 2년만에 영인이를 낳고 3년 후 폐병으로 죽고 말았어.
그럼 돌아가신 아버님이 첩을 보셨다는 얘긴데 어머님이 어떻게 그 수모를 다 견디셨을까?
사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셨어. 그런데 지금까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머니와 그 작은어머니의 관계야. 굳이 정답다고 까지는 할 수 없어도 함께 화투도 치고 장에도 들리곤 하셨지. 물론 아버지가 작은어머니 방을 드나들 때면 밤새 잠을 못 이루시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작은어머니가 폐병을 앓을 때 한번도 돌아보지 않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정말 친동생처럼 정성껏 간호하셨지. 돌아가시자 통곡하면서 묻어준 것도, 영인이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며 키워준 것도 바로 어머니셨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어머니의 그 미묘한 감정을 한순간 알 것도 같다가 끝내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다만 영인아, 그러면 너 죽어, 죽는다고. 라며 벌컥벌컥 역정을 내시던 오늘 아침 어머니의 모습만 시리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여보, 과연 지금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는 것만이 최선의 길일까? 어머니가 당신의 과거를 완전히 잊으실 때까지 만이라도 조금 더 집에서 모셔보는 게 어떨까?
사실 나야 당연히 그러고 싶지. 단지 당신이 너무 고생하니까 염치가 없어서... 남편의 말끝에 살짝 물기가 묻어 났다.
여보, 나 솔직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내 자신도 잘 몰라. 하지만 어머니는 3년씩이나 시앗의 병시중도 들었잖아. 일단은 올해 말까지만 한 번 정성껏 모셔볼 거야.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아.
목이 메어서인지 남편은 묵묵히 내 밥에다 익은 고기를 올려놓았다.
이제 늦더위도 가셨으니 곧 가을이 오고 또 해가 바뀌겠지. 그러면 내년 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새 원피스 꺼내 입고 남편과 꽃구경을 가야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