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일컬어 위기의 시대, 단절의 시대, 인간성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가공할 물질문명 속에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벌레처럼 우글거리다가 생명의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우주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인류가 두 발로 직립한 이래 이 시대처럼 물질적 풍요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해진 걸까? 요즈음 사람들이 모이면, 그리고 모였다 헤어지고 나면 실감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친구가 친구 아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게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임을. 그래서 세상이 나빠졌다고, 살기 어려워졌다고들 탄식한다. 동포들 간에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돈 앞에서는 동포를 더욱 경계해야한다고 한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에게 내릴 유언 중에서 이 말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동족을 조심하라고. 슬프고 전율 이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거짓말로 살까? 이 소통불능의 문제,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 그래서 더욱 돈만 믿는 세상, 인류가 파멸 직전에 이른 듯하고 세계는 그렇게 종말을 맞을 것만 같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상은 언제부터 악으로 물들기 시작했을까?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는 아테네가 야만족의 침입을 받자 아테네 편에 서서 적을 물리친다. 아티카 왕 판티온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딸 프로크네를 그에게 아내로 준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처제인 필로멜라를 사랑하게 된다. 그는 필로멜라를 강간하고 이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혀를 잘라낸다. 그럼에도 그의 잔인한 행위가 드러나게 된다. 프로크네는 복수심에 가득 차서 지체 없이 아들 이티스를 끌고 갔다. 아이는 어떤 운명이 자신에게 닥쳐올지 이미 알고 엄마의 목에 매달려 애원했지만 프로크네는 눈도 돌리지 않고 아이의 가슴과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아이의 식도(食道)를 잘랐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는 아이의 팔다리마저 갈기갈기 찢었다. 몸의 일부는 솥 안에서 끓었고 다른 일부는 꼬챙이에 끼워 구워졌으며 이를 테레우스에게 식사로 대접했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은 셈이다. 이를 모르고 테레우스는 아이를 찾았다.“이티스를 데려와!” 이제 프로크네는 더 이상 자신의 잔인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네가 찾는 그 아이는 네 몸 속에 있다”고 외쳤다.
이 한 예로써 우리는 이미 고대세계 속에도 모든 형태의 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니체는 인간을 <신과 짐승 사이의 다리>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인간이 갈등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갈등은 방황이다. 끝없이 선과 악 사이를 방황하는 불행한 존재, 인간성의 상실을 두려워하고 회복하려고 애쓰는 존재, 그래서 신 가까이로 가고자 한다. 예술을 하면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자 한다. 어쩌면 종교와 예술은 둘 다 반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문학이 그렇다. 지난 6월 중국에서는 13만 명의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중국 20세기의 10대 문화우상을 뽑은 일이 있다. 그 결과 <현대 중국문화의 어머니>로 노신(魯迅)을 1위로 뽑았다. 광인일기, 아큐정전을 쓴 문인이다.
그는 본래 의학도였다. 어느 날 그는 정신에 병이 든 중국 사람들을 보았다. 광대한 대중의 병을 고치려면 청진기로는 불가능하고 역시 문학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는 문인으로 변신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수상(隨想)이라는 이름으로 시평(時評)도 발표했다. 수천 년 중국 역사상 당대에 노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한 문인이 없다. 노신의 글은 대중의 마음에 파고들었고 중국사회에 청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인간성의 끝없는 전락을 막아온 문인들 중에는 유난히 법학도가 많다.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 의사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세계문학사의 보고, 인간희극을 쓴 발자크, 보바르 부인의 프로벨, 스탕달, 톨스토이, 괴테 등.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한결같이 불의(不義)를 보면 분노하라는 것이다.“안 된다고 말하라”는 볼프강 볼헤르트의 단호한 육성은 아직도 살아있고 유효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이미 문인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얄팍한 존경과 감탄을 보내는 독자의 말에 애착하는 것도 성숙한 문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즈음 문인도 범람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생활의 여유를 준 이유이기도 하겠고 인간성 상실시대에 가상한 반작용일 수도 있다. 문제는 언제나 사이비(似而非)이다. 세상에 푹 빠져 좋은 게 좋다며 아픈 곳을 외면하면서 어깨에 별 하나 다는 기분으로 문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성경에 이르길 말세가 가까워오면 젊은 목사들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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