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선 <본보편집위원>
본국의 유력 인사들은 가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납득 안 되는(?) 외유를 한다. 그들의 한국 내 위상이 장기간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할 정도로 한가해 보이지 않는데도 짧게는 몇 달, 길어지면 몇 년씩 한국을 떠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회장들 치고 한 두번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드물다. 대통령 선거에서 진 후보들은 필수 코스다. 가끔은 국회의원들이나 전직 고위공무원들도 이에 동참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초등학생들에게도 결코 단순한 해외여행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왜 그 떵떵 그리며 살 수 있는 한국을 떠나 알아주는 사람 없는 낯선 나라에서 머무는 고행을 감수할까.
알만한 사람들은 연유를 다 짐작할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름하여 ‘도피성 외유’라 부른다.
도피성 외유. ‘적법하게 해외에 나가기는 하는데 어떤 안 좋은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단골로 찾는 나라는 대게 미국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사는 베이지역이 인기 다. 날씨 좋고 구경거리 많으며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명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이회창, 정몽준씨가 스탠포드를 다녀갔고, 지금은 김승연 한화그룹회장이 온다고 한다.
미국으로 도피성 외유를 오는 인사들은 대부분 유명 대학교 연구소의 ‘방문연구원’자격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외적인 외유 목적은 대게 ‘학술연구’다. 연구제목도 아주 그럴 듯 하고 거창하다.
최근 도피성 외유로 회자되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연구주제는 ‘한·미 관계의 미래와 NGO(비정부기구)의 역할’이다. 그가 정말로 스탠퍼드 대 아태연구소에서 그런 주제를 연구할 것으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베이지역에서 진짜 체류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목적으로 미국 방문허가를 받아 이미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스탠포드대 캠퍼스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갑작스런 출국에 대해 ‘대선 자금 수사를 피하기 위한 출국’이라고 말들이 많다.
나는 그가 왜 미국에 오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 것인가 충분히 짐작한다.
허나 그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오든 관심을 갖고 싶지 않다. 그가 미국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에도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문턱 높기로 유명한 스탠포드가 한국의 재벌회장과 정치인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한 이유도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이젠 한국에서 그런 안 좋은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는 관행이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도피성 외유는 원초적으로 떠나는 사람의 불법적인 행위를 전제로 한다. 대통령 후보의 경우 선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떠나 주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선거기간 중의 불법과 보복으로부터의 도피와 다르지 않다.
특히 그 불법행위는 개인적인 불법행위라기 보다 얼굴을 숨긴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당사자는 그 행위가 이루어질 당시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위가 면책될 수는 없지만 처벌받아야 할 진짜 책임자는 따로 있는 것이다.
숨어있는 책임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 그 일을 감추어야 하고, 그런 이유로 도피성 외유는 그들의 은밀한 지시나 묵인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불법은 함께 저질러 놓고 한쪽보고 죄를 다 뒤집어 서라면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잡아넣을 수도 없고 당사자의 등을 떠밀어 해외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국민을 기만한다. 언론은 전후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증거가 없어 직접화법으로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
몇 년째 해외에서 방황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그 일에 대한 시효가 지나거나 세인들의 관심이 멀어지면 슬그머니 입국토록 해 대충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피성 외유의 결말이다.
먹고살기에도 고달픈 민초들은 그런 저런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긴가 민가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의 불법정치자금 제공도 그렇다.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 오너의 개인적인 책임이 면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기업인보다는 불법정치자금을 요구한 정치인들에게 더 큰 잘못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도피성 외유는 그런 의미에서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다. 음습한 부정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음모의 소산이다.
그런 외유가 존재하는 한 한국정치의 선진화는 요원하다.
새해에는 더 이상 그런 이유로 미국에 도피성 외유를 오는 사람들이 없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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