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에 모아져서는 안될 단어들을 충돌시킨다. ‘미래의 기억’ 말이 되는가. 안 된다. 그렇지만 호기심을 자아낸다. 다름 아니다. 눈을 끄는 제목을 다는 수법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 영원한 것, 변해서는 안 되는, 고이 간직되어야 하는 것. 그런 것에 ‘죽음’이란 단어를 달아라. 사람들이 쳐다본다. 팔리는 제목을 다는 또 다른 방법이다.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된 수법이니까. 요즘 들어서는 오히려 진부해졌다.
신은 죽었다. 한 세기 전 니체의 선언이다. 이제는 모든 것에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판이다. 상식. 선과 악. 변하지 않아야 할, 이런 것들에 마구 죽음이란 단어가 붙는다.
죽음이란 단어가 붙으면 왜 호기심을 자아낼까, 뭔가를 예언하는 듯 해서다. 그리고 그건 불안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문화비평가의 말이다.
확실한 비전은 없다. 그렇지만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뭔가 지켜져야 할 것의 모서리가 자꾸 떨어져 나가면서. 그래서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말이 충돌한다. 또 ‘…의 죽음’식의 표현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이걸 두고 충돌코드라고 하던가.
2003년은 충돌코드가 지배한 해다. 한국의 한 논객이 꼬집은 대목이다. 모든 것이 충돌이었다는 거다. 한국의 정치가, 사회가 모두 충돌에서 균열의 상황을 맞았다는 진단이다.
그 충돌의 문화적 반영이 영화라는 대중예술의 한 구석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맹은 죽었다. 2003년은 대서양 동맹이 사망신고를 한 해다. 프랑스와 독일이 사사건건 물고늘어진다. 많은 미국인들이 마음 아파한다. 동맹국이 그럴 수가…. 틀린 말이다. 더 이상 동맹이 아닌데 동맹으로 착각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의 선언이다. 영원한 동맹이란 없다. 국가적 이해만 영원할 뿐이다. 이 경구가 통용되는 시대란 말이다.
20세기 후반부 국제안보는 대서양 동맹을 축으로 유지돼 왔다. 그 동맹이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와해됐다. 공산주의의 사망과 함께 서로의 이해가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새로이 동맹의 라인업이 형성되고 있다. 앵글로-색슨(미국·영국·호주 등)과 일부 유럽국가들(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 그리고 일부 구 동구권 국가들)이 그 근본 축으로,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그 윤곽이 한층 뚜렷해졌다.
이 새로운 라인업은 그러면 아시아 지역에서는 어떤 형태로 굳어질까. “미국과 중국의 양극화 현상은 언젠가 아시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본은 국난의 시대를 맞을지도 모른다.” 일본 쪽에서 나온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두 세력의 양극화는 필연이다. 따라서 일본은 새로운 정체성 확립과 함께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해답도 나와 있다. 해양세력, 해양문명으로서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재정립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확실히 다진다는 것이다. 미국과 한 배를 탄다, 아니 이미 탔다. 그게 일본에서는 이미 2003년에 나온 큰 그림이다.
그리고 2004년이다. 미국서는 대선이다. 한국서는 총선이고.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그렇지만 너무 공교롭다. 두 나라가 동시에 선거라니. 끈질긴 연 같은 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이번 선거 결과는 뭔가 두 나라의 앞날에 긴 그림자를 던지지 않을까.
올 미국의 대선은 부시 정책에 대한 재신임 투표다. 새로운 동맹구축이란 해외정책에 대한 추인 절차로 보아도 무방하다. 9.11 이후 그 방향성은 이미 굳어졌기 때문이다.
재신임을 받을 때 이런 부시 독트린은 더 탄력을 받는다. 거칠 것이 없다. 그 가능성은 크다. 해외정책이 이슈가 된 대선이니 만치 부시의 승리가 무난해 보여서다.
“…총선에 임하는 노 대통령의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사활(死活)을 건 인상이다. 뭔가 무리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한국 내 정치 관측통이 내비친 ‘감’이다. 마치 거대한 충돌을 향해 나가는 형국이다.
왜 필사적인가. 총선은 사실상 재신임 투표다. 그러므로 실패하면 바로 헌정 위기다. 게다가 한번 밀리면 진보는 설자리가 없다. 이게 대체적인 이유로 설명돼 있다. 그뿐인가.
뭔가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설명이 잘 안 되는 이유 말이다. 그건 일종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진보·자주·민족공조 등의 말로 탄탄히 포장돼 노출이 안된 본능 말이다. 대륙세력, 대륙문명에의 회귀본능이다. 그런 게 의식의 밑바닥에서 충돌의 기제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선거의 해 벽두에 문득 떠오르는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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