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권력층 가운데 최고 실세 중 한사람이었던 황장엽 씨가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김일성-김정일의 사상적 기조를 제공했던 북한제일의 이론가 황장엽은 자신의 망명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행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정치체제의 사상체계를 운영하던 당사자로서 사회발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새 길을 열고자 했을 때, 그 문제가 바로 민족통일이라는 거대한 과제와 결부돼 새 방향을 택해야하는 운전자의 갈등을 본인 이외에 아무도 실감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백범 김구가 강대국들의 달콤한 사주를 박차버리지 않았더라면 비명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오늘처럼 추앙받는 인물로 우리들의 뇌리에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오로지 남북 분단만은 막아야 되겠다는 처절한 애국심 하나 때문에 자기 몸을 불태워 버린 김구의 희생은 완전히 세속을 초월한 자기 승화였던 것이다.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역사적인 남북협상의 장도에 오른지 49년 후 1997년 북한 주체사상의 설계사 황장엽이 남행을 결행했다. 그는 자신의 망명동기에 대해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74세였던 황장엽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쓴 자술서에서 “나의 여생은 얼마남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술회하고 있다. “여러분 38선이 굳어지면 민족의 앞날이 불행합니다. 내 나이 일흔셋이니 살만큼 살았소.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할게 무엇이 있겠소…”라며 경고장 베란다에서 그의 북행을 말리던 군중에게 해산을 호소하던 김구의 심정을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남행을 결심한 황장엽. 그를 배신자니 뭐니 갖가지 요설로 매도하는 것은 그의 망명이 가장 아팠던 김정일과 그 일당이다.
황장엽은 한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남북간 국가연합이 북한이 추구하는 통일정책의 기본이며 통일의 최종단계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망명 직전의 ‘결심서신’에서부터는 남한을 주제로 한 통일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는 “계급주의적 독재국가들에서는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개인숭배 사상이 지배하고 지도자의 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함으로써 자주적인 사상 발전을 억제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의 저서 ‘인간중심 철학’) 요컨대 사상을 독점하고 인민들의 자주적인 사상 발전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곧 인간의 자주적인 생명과 생활을 박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시사적으로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가 속박돼 인권을 탄압받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획일적인 정치체재를 유발하며 절대다수의 북한 동포가 극한의 굶주림에 처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족 모두의 공동 이익을 찾지 않고 개인 이익 독재권력을 위해 탄압 폭력을 다반사로 한다면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부정의 부정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것이다.
황장엽의 망명을 절대로 우발적 사건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북한이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양보하며 협력하고 통일의 길로 가려 하는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일방적으로 북한을 달래려는 입장에만 서 있다가 마침내 그들을 두려워하는 처지로 코가 꿰인 상황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황장엽은 북한의 내막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 들거나 그를 이용해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의 통일론이 왜 남한주도의 통일로 바뀌었는지를 경청하고 배우고 그와 함께 규명해야 한다. 또 가장 올바른 통일의 길이 무엇인지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해야 한다.
김구는 ‘마음속의 38선의 무너져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속의 38선을 없애려면 1인 독재를 용서치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자라면서 또 진보라면서 독재를 옹호하는 엉터리 바보짓을 말아야 한다. 신을 절대 부정하는 유물론자에게 아부하는 기형적 종교인들도 더 이상 신 앞에 죄악을 짓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민주화 실현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평화적 통일론이다. 북한의 민주화야말로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에서 북한 동포를 구제하는 길이다. 황장엽의 앞으로의 활동이 우리 앞에 언제나 우뚝 서 있는 김구의 민족주의를 다시 살리고 통일의 지름길로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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