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일곱시 반
134번 프리웨이와 2번 프리웨이가 만나는, 할비와 윌슨 코너에, 오늘도 어김없이 낯익은 회원들이 모였다. 미세스 김은 어느새 자동차 뒷문을 열어놓고, 회원들에게 잣 세개를 띄운 쌍화차와 호두과자 두개를 나눠주고 있다. 내가 이 산악회에 들어온 후,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 오는 그녀의 봉사다. 그동안 “thank you.”라는 말만 간단히 던지며 당연하게 먹고 마셨지만, 생각할수록 그녀가 다시 보인다. 바뿐 사업과, 가사 일, 그리고 남편의 간병까지 감안할 때, 꼭두새벽에 일어나 쌍화차를 두병씩 끊여 들고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 속에서도 눈에 띄게 화사한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도 않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란다.
회비 10불을 받으며, 출석표에 내 이름을 적고 있던 김 총무가, “그래, 그동안도 잘 지냈씨요?”하고 물었다. 그분 특유의 개구진 표정하며, 한 깨달음 얻은 듯한 웃음이, 주름지기 시작한 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거칠면서도 입천장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갱엿같이 맛나고 정감스럽다.
안개 낀, 제법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회원들을 태운 세대의 차가, 앤젤레스산을 향해 신나게 달린다. 그중, 가장 크고 내부를 리무진처럼 꾸민 8기통 Van은 형편이 나은 어느 회원이, 우리 산악회 회원들을 위해 장만하여, 매달 봉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각박한 요즘의 현실을 생각할 때, 매우 흐뭇한 미담이 아닐 수 없다.
메마른 남가주의 기후 조건에서도 이름 모를 각종 사막식물들이 산 초입에서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깎아지른 절벽과, 원만한 산자락을 가리지 않고, 태어난 곳에서 한세상을 말없이 산다. 더러는 중장비에 깎인 벼랑끝에 물구나무로 매달려 있기도 하고, 더러는 곧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바위 곁에 붙어 서서 독특한 잎과 꽃으로 한껏 모양을 내고있다. 약한 지반이 언제 무너져, 곤두박질치며 천야만야의 계곡 아래로 떨어질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양, 너무도 곱게 웃고 있다.
오히려 안쓰럽게 바라보던 나에게 멀어지며 한 말씀하신다. 뽑히던 꺾이던 먹히던, 웬 걱정이냐고. 주어진 이름대로 생긴 그대로, 허락된 만큼만 살다 가면, 그뿐. 연연할게 무어냐고. 어차피 영원한 것도 아닌데.
해마다 봄이 되면, 장대 같은 기둥 하나씩 뽑아 올려, 몇백 몇천 개의 하얀 꽃을 피우던, 탐스럽고 아름다운 유카나무가, 그 우아하던 미모는 흔적도 없이 버리고, 흉측한 몰골로 죽은 채 서있다. 한번 꽃이 피면, 그대로 생명을 잃고 마는 유카. 줄줄이 매달린 씨들만 눈길을 끈다. 늦은 가을이다. 각종의 꽃으로 한동안 화려했던 천사의 숲은, 봄과 여름에 보았던 그 얼굴이 아니다. 사색에 잠긴 듯, 숙연한 침묵 속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먼 산 위에서 하늘을 만지는 진록의 침엽들 위로, 햇살이 빙편처럼 영롱하다.
주차장에 차 세대가 나란히 선다. 차 문이 드르륵 열리고, 저마다 독특한 미소 하나씩을 입에 물고 모두들 밖으로 나온다. 모처럼 다시 산에서 보낼 오늘 하루의 기대와, 답답한 일상에서 풀려난 해방감으로 표정들이 밝고 젊다.
차례대로 자신의 백팩을 찾아 등에 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우뚝우뚝 나타나는 아름드리 준수한 소나무들. 무성한 도토리 나무들. 커다란 바위들과 뒤늦게까지 피는 꽃들이 눈을 맞추자고 쉴 틈 없이 신호를 보낸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답답한 가슴을 속 시원히 풀어줄 공간은 끝도 없이 펼쳐 있다. 누구였을까? 맨 처음 이 산을 올라간 사람은. 길도 없는 산허리에 발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지고 나무 가지에 긁혀 피도 흘리며, 이처럼 운치 있는 등산로를 찾아낸 사람은.
새로 떨어진 낙엽 밑에서 이제는 흙가루가 다된 묵은 잎들이 푹신하게 밟힌다. 년년을 두고 떨어져 부식된 낙엽들이 이렇게 좋은 흙이 되다니. 어디 낙엽들뿐이랴. 들짐승 벌레 아름드리 키 큰 소나무도 벌러덩 넘어져 뿌리를 쳐들고 누운 채,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온 길이 하, 멀다보니, 돌아가는 길도 꽤 멀고 시간이 걸리나보다. 내내 견고한 자세로 의연하게 견디더니, 언제부턴가 옆구리에서 붉은 살점들이 흩어지고 있다. 한 움큼 집어 손바닥으로 비벼보았다. 단단한 근육은 간데 없고, 부드러운 살점들이 곱게 부서진다.
빗물로 채운 물기는 모두 하늘에 주고, 땅에서 키운 나무의 육질만 남아,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와해되고 있다. 자기가 취한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놓고 가는 세상의 이치! 혼자 머리를 끄덕이며 한 수 배운다. 자, 힘내자. 정상이 보인다.
신하연
약 력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상 수상
▲한국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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