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오래간만에 미국 경기가 기지개를 펴는 해가 될 것이란 전망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GDP 성장률은 수 십년래 최고를 기록하고 실업률은 내려가고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1만선을 넘는 등 각종 경기 지표는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과연 이들 전망대로 올 경기를 낙관해도 좋은 것인지 짚어본다.
미 주식은 가장 훌륭한 투자 수단의 하나다. 지난 70년 간 연 평균 1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해왔다. 1,000달러가 매년 10%씩 늘어나면 70년 후에는 100만 달러가 된다. 70년 전 1,000달러는 큰돈이었겠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보통 할아버지도 손자를 백만장자로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주식의 평균 상승률과 일반 투자가의 평균 수익률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주식에 투자한 미국인의 연 평균 수익률은 인플레나 은행 이자에도 못 미치는 2% 남짓이다. 어째서일까.
그 까닭은 대다수 투자가는 주식이 가장 비쌀 때 샀다 제일 쌀 때 팔기 때문이다. 주가가 가장 올랐을 때는 ‘수 십년래 최고의 경제 성장률’ ‘실업률 하락’ ‘주가 최고치 갱신’ 이란 뉴스가 신문을 가득 메우기 마련이다. 반대로 주식이 쌀 때는 ‘경제 또 마이너스 성장’ ‘끝없는 실업자 행렬’ ‘주가 폭락 언제까지인가’라는 헤드라인이 쏟아져 나온다.
벌써 태고적 이야기 같지만 미 경기가 정점에 있던 2000년 3월 경기 전선에는 한 점의 어두움도 없었다. 미 주가는 9년째 상승했고 미 GDP는 연 7%의 고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도 이라크 전쟁도 미래의 베일에 가려져 있 었다.
연방 정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매년 수 천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고 하이텍 혁명과 닷컴 붐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 있는 경제학자들마저 “경기 사이클이란 과거의 유물로 사라졌다”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그 후 3년 간 하이텍 기업이 집중돼 있던 나스닥은 80%나 곤두박질 쳤으며 수많은 닷컴 기업이 파산하고 미국내 일자리는 300만개가 사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상 유례 없는 테러 공격까지 받자 이제는 ‘미국 경제는 끝났다’는 비명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우가 7,000선을 위협하고 나스닥 1,000이 깨지느냐 마느냐를 논하던 2002년 10월 신문을 보면 경제가 좋아진다는 뉴스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식 투자의 적기는 바로 그 때였다. 1년여 사이 나스닥은 거의 2배, 다우는 40%가 올랐다. 이와 함께 모든 신문 경제면은 다시 장밋빛 뉴스로 도배질 되고 있다.
주가는 6개월에서 1년 후 경기를 내다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다. 주식 투자가가 아닌 사람도 주가 동향에 무심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인 자본 조달의 주 수단인 주식 시장의 건강은 실물 경제의 건전도와 직결돼 있다. 현재 미 증시는 과연 건강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아니다’다. 지난 1년 간 가장 많이 오른 주식은 가장 배당금도 적고 수익도 나쁜 하이텍 주들이다. 상대적으로 튼튼한 회사 주식은 이들에 비해 훨씬 덜 올랐다. 그나마 우량기업을 모아 놓은 스탠더드&푸어 500대 기업의 평균 수익에 대한 주 가 비율(P/E)은 역사적 평균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과대 평가돼 있다.
이런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투자가들의 심리 상태를 재는 여러 지수는 낙관론이 지배하고 있다. 아직도 사상 최고치였던 다우 11,700, 나스닥 5,000까지는 갈 길이 먼데 이들 지수는 2000년 3월보다 높으며 투자가 중 ‘주가 폭락이 임박했다’고 믿는 사람은 1% 미만이다. 일반 사회에서도 겸손한 사람이 생명이 길 듯 증시도 기반이 탄탄할수록 분위기가 조심스럽다. 요즘처럼 투자가들이 ‘오만한’ 태도에 물든 것은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위험 신호다.
증시에 못지 않게 낙관론이 우세한 분야가 있다. 주택 시장이다. 미 부동산은 1994년 바닥을 친 후 10년째 상승세를 타왔다. 올해도 호황은 불을 보듯 환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이유로는 낮은 모기지 율, 계속되는 인구 증가, 각종 규제로 인한 공급 부족 등을 들고 있지만 낙관론의 밑바닥에는 ‘10년 간 오르던 것이 왜 갑자기 떨어지겠는가’ 하는 안이한 자신감이 깔려 있다.
그러나 뜨겁기만 하던 주택 시장이 식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5월 피크를 이뤘던 모기지 융자 건수는 지난 12월 현재 68%가 감소했다. 이는 1년 전에 비해 30%가 줄어든 것이다. 워싱턴 뮤추얼과 컨추리와이드 등 대표적인 모기지 회사들은 내년 침체에 대비해 수천 명씩 감원을 단행하고 있으며 역시 주택 경기를 점치는 선행 지표로 쓰이는 주택 건축회사 지수 또한 지난 10월 정점을 이룬 후 하강세를 보이고 있다.
시애틀에서는 10년 전 LA 한인들에도 친숙한 용어였던 모기지 총액이 집 값보다 큰 ‘쇼트 세일’이란 단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 하이텍의 본산 샌프란시스코 주택가는 1년째 내림세를 걷고 있다.
버블의 특징은 터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버블로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표적 경제통인 앨런 그린스팬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미 주가의 “비현실적인 낙관론”을 경계한 것이 1996년 겨울이었다. 그 후 하이텍 버블이 터지는데 3년 반이 걸렸다.
미 주택가는 지난 수년간 미국인 소득 증가율의 3배에 달하는 속도로 치솟았다. 소득과 집 값과의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집 사기는 어려워지고 집을 사는 사람도 페이먼트 부담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주택 구입 여유지수는 계속 하락하고 주택 차압률은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 3년 간 주가 폭락과 불황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기가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동산가 상승과 사상 최저 수준의 낮은 금리를 이용한 재융자를 통해 빼낸 돈이 소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 금리가 상승세로 돌면서 재융자 붐은 사실상 끝났고 내년 주택 경기도 식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부시 행정부는 2004년 대선을 의식, 경기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감세,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세금 환불, 사상 최저의 이자율, 수출 진흥을 돕기 위한 저달러 정책, 철강, 목재, 의류 업체 일자리 보호를 위한 보호 관세와 대대적인 농업 보조금 지불 등등.
그러나 이런 정책은 단기적인 부양 효과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부메랑이 돼 돌아올 위험이 있다. 우선 대대적인 감세와 지출 초과로 연방 재정적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매년 5,000억 달러가 넘을 전망이다. 또 달러화 약세 정책으로 지난 3년 간 달러는 유로화에 대해 50%나 폭락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이에 못지 않은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년 엄청난 액수의 외국 투자자금을 끌어 들여야 한다. 달러화 폭락으로 인한 투자 손실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미 채권 구입을 중단할 경우 장기 금리 급등과 함께 미국 경제가 주저앉을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현재 공식적인 실업률은 5.9%에 불과하지만 찾다 찾다 지쳐 아예 일자리를 구하기 포기한 사람, 원하는 직장을 찾지 못해 반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까지 감안하면 실질 실업률은 10%에 육박한다.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는데 이처럼 일자리 창출이 안 되는 상황은 수십 년 래 처음이다. 이 또한 겁 없는 낙관론에 제동을 거는 위험 경보다.
지난 수년간 미국경제가 이 정도나마 굴러 온 것은 소비자들이 소득이상의 지출로 경기를 부양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출이 소득을 앞서는 현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공통되는 것이지만 경기 예측이야말로 불확실한 과학이다. 지난 수 십 년 간 미 경제사를 보면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이 호황과 불황, 주가 폭등과 폭락을 정확히 예측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한쪽의 일방적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반대의 경우가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새해를 맞아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해야겠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도 있다. 전문가와 언론의 말을 그대로 믿기 전 이들이 과연 과거 얼마만한 정확도를 보여줬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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