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착 100년 선우 학원 박사 가계
조부가 1904년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의 틀 마련
일제로부터 조국해방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애국자
교직생활외 왕성한 저술활동과 북한 개방에 기여도
미주 한인들의 공식적 이민이 100년을 기록했다. 1903년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노동자로써 미국에 첫발을 디딘 100여 최초의 이민자들이 100년동안 100만 이상으로 불어났다. 첫 뿌리에서부터의 세대로 따져도 이미 4번은 손쉽게 물갈이 되어 이제는 그들의 증손, 고손들이 한인사회의 중심에 서있다.
선우 학원 박사(85)도 사탕수수 노동자로 1904년 단신 미국에 왔던 할아버지 선우 탁(작고)로부터 시작하여 4번의 세대가 교체된 역사의 중심에 서서 진두지휘하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에 다름 아니다.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가족의 이민역사는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3.1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사한 부친의 외아들로 그는 일본유학생 시절을 거쳐 1938년에 20세 나이로 LA에 왔다. 그의 조부는 이미 1904년에 하와이를 거쳐 미본토(아리조나주)에 상륙해서 이민의 틀을 만들고 있었다.
선우학원 박사, 그는 누구인가?
한인이민사가 막 형성된 1900년대 초부터 70년대 물밀 듯 미국에 밀려왔던 이민자들까지 그동안 일어난 한국의 변혁과 민주화 과정을 지켜봤던 사람들이나 북한과의 통일문제등 사회적 이슈에 관심 있는 한인들에게는 그의 이름과 얼굴은 잘 알려져 있다.
85세의 고령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어바인 자택에서 보내지만 그는 아직도 미국과 한국, 세계를 잇는 몇 안되는 석학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골치 아픈 국제문제가 발생하거나 남북 통일이라는 명제가 나오면 그의 이름은 독보적 해결사(?)로 거론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는 일제로부터의 조국 해방과 4.19 학생운동 발발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온몸을 던졌던 수명의 학자나 애국자들중 한명으로 변함없는 나라사랑의 길을 꾸준히 걸었기 때문이다. 또 군사독재 정권 반대 및 김대중 전대통령을 포함한 민주화 인사의 체포, 구금, 처형을 막느라 미국 주류사회를 불철주야 뛴 때문이다.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그는 특히 김대중 대통령을 죽음에서 살려낸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그는 미국도착 5년후인 1943년부터 UC버클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실력을 갖춘 그는 1945년에는 석사를, 1950년에는 박사학위를 따냈다. 저술 활동도 왕성하여 1944년부터 한국어 교본부터 시작하여 98년의 한.미관계 50년사까지의 다양한 정치, 역사, 철학분야의 서적을 20여권이나 펴냈다.
또 천직인 교직에만 머무르지 않은 것도 그의 특별한 면이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 국가에 대해서도 문을 닫았던 북한 개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 결과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일부 문을 열게 하는데 기여했다. 1975년부터 처음 방북하고 그후에도 10여차례 왕래했으며 1981년에는 북한과 해외동포 기독자와의 대회’를 조직, 10년간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5,000여명의 해외 한인들의 방북을 성사시키는 업적을 세웠지만 반대급부로 지난 30년간 조국방문조차 불허된 친북 인사라는 모진 낙인을 얻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친북, 또는 빨갱이라는 주변의 호칭을 믿지 않는다. “전 친북도 친남도 아닌 그저 프로 코리아입니다”라는 그는 남북의 통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나의 생전에는 안될 것”이라고 믿고 말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이 현실이고 한나라가 두동강이 난 것은 옳지 않은 일이므로 계속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워싱턴주, 미주리주로 이어진 대학교수직을 5년전 은퇴했다. 그러나 UC어바인등이나 대학당국은 아직도 객원교수로 그를 강단에 세운다. 지난해 1년도 UCI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1950년도 되지 않아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4.19 이후 희망을 품고 입국한 한국에서 1년간 교수(연세대학교)로 재직한 경험도 있다. 또 73년에는 아주종합대학 총장과 한국문화 협회 재단이사장직에 내정되어 영구귀국의 보따리까지 싼 적이 있다. 그의 영주귀국 꿈은 당시 선포된 유신체재와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무산되고 말앗다.
그의 활동은 대부분 물밑에서 이뤄졌으나 실력과 경험, 인품을 모르지 않는 한인사회는 그에게 현재 한인 이민역사의 기록이라는 중차대한 작업의 수장을 맡겨 놓은 상태다.
또 지난 10월에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가 30년만에 그를 한국으로 초청, 그동안의 그의 외로운 노고와 나라를 위한 공헌을 공식적으로 치하하는 상을 수여했다.
■선우 학원 박사 가족은
선우학원 박사의 역사 만들기는 혼자만의 작업으로 그치지 않았다.
1943년 결혼한 아내이자 동료 교수였던 소니아 선우(88)는 그와 함께 미주리주에서 센트럴 감리대학 교수로 30년을 재직했다.
그는 교수로서 또 남편과 두 아들(선우 잔, 선욱 쿡)을 뒷바라지 하는 바쁜 시간을 쪼개 70년대에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진신부로 미국에 이민한 한인여성 80여명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교수직까지 1년 휴직해가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직접 대화하고 모은 그자료는 우여곡절 끝에 그들 부부가 은퇴후 재정착한 남가주에서 완성되어 올해 “사진신부들(Korean Picture Brides”란 제목의 영문책자로 발간됐다.
선우학원 박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선우 정민(59)으로 연방정부 노사관계 위원회 커미셔너를 거쳐 현재 유엔기구인 ILO 대표로 베트남에 상주하고 있다. 그도 대학졸업후의 사회생활 전부를 노동운동과 사회봉사에 주력해 왔다.
차남 선우 쿡(58)은 한인사회에 비교적 알려진 인물이다. 현재는 비영리기관인 아시아태평양 스몰비즈니스 프로그램 디렉터로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특히 밀집한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톰 브래들리 전 LA시장과 한인사회를 잇는 가교역할도 했고 그후 20년간은 한인타운과 리틀 도꾜가 포함된 저소득층 재개발 프로젝트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인이라고는 그들 가족밖에 없는 미주리주에서 살았고 따라서 한국말도 좀처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그지만 아버지가 강조해온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라’는 가훈은 그를 코리안 아메리칸 소사이어티내에 그의 관심과 시야를 붙들어 맸다고 한다.
4.29폭동이후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폭격을 맞은 듯 불타고 약탈이 횡행하는 거리에 서서 그는 핏줄인 한인들이 생계수단을 강제로 빼앗기는 것을 보고 자본없이 몸으로 때우는 한인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그같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또 한세대 아래로 대물림되고 있다. 이제는 그의 아들 선우 그랜트(24)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나 부친의 길을 따르고 있다.
UC샌디에고에서 전공하던 바이오 엔지니어링을 집어치우더니 아시아 아메리칸 역사를 전공했고 한편으로 아시아 태평양계를 위한 리더십트레이닝 프로그램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랜트는 편안함을 찾았고 UCI에서 할아버지의 역사강의도 들으면서 뿌리 의식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정체를 분명히 찾았다. 5년간 비영리기관에서 일하고 현재 풀타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일이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안계 이민자들에게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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