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용
주홍빛으로 물든 통통한 단감을 태국 태생의 여인이 한아름 들고 일터로 왔다. 저들도 감을 먹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입에 군침이 돈다. 오렌지색깔 보다 더 진한 유혹적인 단감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식탁에 놓인 근육질이 가득한 몸체를 만지게 한다.
몸에 좋다고 해서 잎까지 따 말려 차로 만드는 감은 우리에겐 아주 친숙한 과일이다. 하얗게 꽃이 맺혀서 새끼손톱 만한 초록의 시기를 거쳐 주먹만한 주홍의 날에 이른 달콤한 향기는 늦가을의 까치에게까지 몸을 아끼지 않는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 맏형님 댁엔 지붕을 가리고도 남을 커다란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땡감(단감이 아닌)이었는데 한 그루는 굵직한 장두감이요, 다른 나무는 좁쌀감이었다. 초봄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잎이 손바닥처럼 넓어져 갈 때쯤엔 학교 종 모양의 하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감 꽃은 작은 감일수록 더 하얗고 금붕어 입처럼 더 예쁘고 앙증맞게 핀다.
큰댁은 언제나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맏당숙이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던 탓인지 우리들에겐 친절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하얀 감 꽃이 땅을 뒤덮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빗자루 자국이 나도록 깨끗이 쓸어버릴 때까지 대문은 잠겨 있었다. 조무래기들은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도 뒤 텃밭으로 떨어진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면서 떱떠름한 꽃잎을 하나씩 따먹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줍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담 너머 집안 마당에는 눈처럼 하얀 감 꽃이 까치발을 하고 있는 우리를 애타게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키 작은 아이들은 군침만 흘려야했다.
여름이 되면 여지없이 꽃은 사라지고 감 모양이 드러났다. 조금씩 커 가면 아이들의 관심도 감나무 아래로 쏠렸다. 셀 수 없이 많이 달린 감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약한 녀석들은 미리 떨어져 나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 장마철이 되면 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담 안의 땡감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침잠이 많던 나도 비가 내린 다음날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뒤 텃밭으로 나갔지만 나보다 먼저 다녀간 아이들에게 빼앗겨버린 아쉬움만 안고 돌아왔다.
내 마음을 아시는 할머니는 판식이 하면서 장조카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 일찍 큰댁에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기회를 놓칠세라 할머니의 치마끈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뒤뜰로 달려가 치마 앞자락에 주워담고 뒤돌아 왔던 적도 있다. 다행이 색깔이 우중충한 치마는 감물이 들어도 좋지만 밝고 선명한 색깔의 치마는 그 날로 다른 치마가 돼 버린 것이다. 소금물에 우려낸 땡감을 다 먹어 갈 때쯤이면 할머니가 큰댁을 방문하기를 기다리곤 했다. 가난과 친하게 지냈던 어린 시절엔 과일은 귀하고 소중했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대지를 휘감을 때는 굵직해진 감은 떨어지기를 주저했고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년의 여인처럼 고운 빨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추수할 때가 된 가을 하늘은 높아가기만 했고 아이들도 더 이상 감 꽃이나 미리 덜어진 땡감에 대한 기억보다는 미리 익은 홍시가 풀 위에 떨어져 있기를 바라며 뒤 텃밭을 배회하였다.
들녘엔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논을 갈아엎어 허전해질 무렵이면 할머니는 추수한 밭곡식하고 잘 익은 감을 바꿔치기 해 오셨다. 항아리에 익혀서 하나씩 꺼내올 때에는 정신이 아득하리 만치 할머니가 좋았다. 명주처럼 부드럽고 차가운 감촉은 먹기 전에 몇 번이고 만져보았고 베어먹기가 아까워 꼭지를 따고 빨아대곤 했다.
어느 때인가 부모님은 정년을 앞두고 내 고향에 단감나무를 수 십 그루 심었다. 그것도 맏당숙의 집 앞에 있는 논에다 말이다. 감나무 밭은 풍요의 잔칫상 같았다. 주렁주렁 열린 대추나무 사이에 크기가 각각 다른 감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까지 처져 있었는데 나무마다 맛이 조금씩 달랐다. 절지 가위를 들고 감을 따면서 당숙네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두 그루의 감나무는 고운 색깔을 띤 채 많이 달려 있었고 파란 하늘은 더 높아 보였으며 마음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 코끝이 찡해지며 가슴이 저려왔다.
식탁에 놓인 감 맛이 내가 기억했던 맛과 다른 것은 토양이 다른 곳에서 따온 감이라서가 아니다. 내 고향 밭에서 따온 감처럼 아삭거림이 덜 한 것 또한 이미 한 자루를 서울의 집으로 보냈다는 아버지의 전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약력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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