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한인교회의 한국 고전극 공연이 동포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7일 맥클린 한인장로교회(담임 홍원기 목사)는 맥클린 랭글리 하이스쿨의 강당에서 옛 한국 결혼제도의 인습과 모순을 풍자한 연극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희곡 ‘맹 진사 댁 경사’를 영화화한 것)을 공연, 동포사회에 큰 호응을 얻었다.
돈으로 벼슬을 산 맹 진사는 지체 높은 김 대감 집과 사돈이 되려는 허영에서 사위 될 사람은 보지도 않고 결혼 승낙을 한다. 뒤에 사위감이 다리 병신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기 딸 대신 종인 이뿐이를 결혼식장에 들여보내나 정작 나타난 신랑은 멀쩡한 미남 청년이었다. 신랑은 자기가 절름발이라고 거짓말한 것은 마음씨 고운 여인을 맞기 위한 기지였다면서 이뿐이를 아내로 맞을 것을 선언한다는 것이 ‘시집가는 날’의 줄거리였다.
이날 공연장에는 약 1천여 동포들이 공연장을 메웠고 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동포들이 되돌아갔다. 물론 맥클린 장로교회의 디너 제공 등이 곁들여졌다지만 대중 연예인들의 공연을 제외하곤 동포사회의 음악회나 연극 공연 등이 이처럼 동포들을 끈 예는 흔치 않았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 공연을 위해 투자한 금액이 2만불이나 된다는 사실도 예사롭지가 않다. 한인교회에서 해외선교나 교회건물에 큰돈을 쓰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의 고전극을 공연하는데 이 정도를 투자 하는 것 역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날 공연은 한국어로 진행됐고 외국인들과 한국어를 모르는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영어 설명이 따랐다. 연출자인 김형욱씨는 미국에 사는 한인들에게 모국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고 이민 100년을 맞아 한인 청소년들에게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준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교회에서는 이번의 성공에 힘입어 ‘시집가는 날’을 내년에 다시 한번 공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워싱턴에서의 ‘시집가는 날’의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59년 가을 워싱턴 한국학생회(회장 박동선)에서 초연한 이 연극에서는 서준택이 감독을, 학생회 문화부장이었던 양숙희가 신부인 이뿐이 역을 맡았다. 이때는 해마다 학생회에서 ‘코리언 나이트’를 열며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갖가지 행사를 펼쳤는데 그해는 ‘시집가는 날’을 공연했다. 당시 공연에 사용된 가마 등은 뉴욕 총영사관에서 빌리고 약 100명이 관람했다 한다. 이번 공연으로 워싱턴에서는 44년만의 앵콜 공연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 22일에는 워싱턴 한인천주교회가 신판 ‘흥부와 놀부’를 공연하여 600여 관람자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흥부전은 잘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고대소설로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같이 판소리 계열에 속한다. 이날의 공연은 천주교회의 청년회가 4번째로 여는 ‘문화의 밤’ 행사였다.
신판 ‘흥부전’은 문자 그대로 신판, 즉 재미동포 판이었다. 흥부전의 줄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이민사회의 현실을 접목시키려는 듯 바디 워쉽과 젊은 가수들을 흉내낸 격렬한 율동을 가미한 뉴 버전이었다. 2세들의 혀 굳은 듯한 발음과 특히 놀부 역을 맡은 테드 킴의 능청스런 연기는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한국의 고전극들이 미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사랑 받는다는 것은 미국과 한국문화의 접목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한인사회가 문화적으로 미국과 한국의 중간에 서 있는 존재라면 이에 상응한 문화의 형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 바 이 땅에서 공연되는 한국의 전통극들이 한인문화의 기층을 이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간간이 선을 보였던 국악가락은 동포들의 정서적 고향을 자극했다.
또한 이번 공연에서 한인교회의 선교방법도 세련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원을 받으라며 교회 예배참석과 성경공부를 강조하기보다는 스스로 동포들을 찾아 나서 동포들의 문화적 배경을 일깨우는 이른바 예술을 통한 지역선교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인교회 주도의 이 같은 문화적 행사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과 지역선교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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