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르타커스(Spartacus) 와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지난 번 칼 럼은 최근의 영화 Matrix에 대하여 썼으므로, 이번에는 걸작 고전 중의 하 나인 스팔타커스 (Spartacus: 1960) 에 대한 평과, 아울러 그 것을 개작한 리바이벌이라 할 수 있 는 글래디에이터(Gladiator:2001) 에 대 하여 평을 써 보려고 한다.
두 영 화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전 하려는 것이 이 칼럼의 목적이므로, 이 두 편은 글래디에이터 (로마시대의 원 형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 움으로서 귀족들에게 오 락을 제공한 검투사들) 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룬 것이지만, 전혀 다른 주제의 축을 가지고 있 고, 스팔타커스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명작인지를 말 하고자 한다.
독자들께서는 우선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두 영화를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서 감상하시기 바란다. 어느 지역 도서관이나 있을 것이다. 없으면 온라인으로 신청해 놓으면, 집 근 처의 도서관까지 도착하여 찾아 가라고 연락이 온다. 이렇게 좋은 시스템을 갖춘 미국에 살면서, 한국 드라마, 비디오만 보지 말고, 이정도는 향유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우선 스팔타커스라는 영화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스팔타커스라는 노예가 글래디에이터가 되고, 노예 반란을 일으켜서 로마 제국을 약 2년간 놀라게 했던 실존했던 노예반란지도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무엇이 주제 일른지는 대충 짐작이 갈것이다. 자유이다. 자유가 없는 노예에게 자유보다 더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이 두 영화와 그 주제가 성탄절을 앞 둔 시점에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골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은 왜 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마태 1:21). 그 구원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자유가 될것이다. 노예가 없다고 해서, 오늘날 자유가 필요없는 사람이 있는가? 온갖 욕심과 허영심, 분노, 자존심, 상처 받음 그리고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우리 모두는 끝없이 자유하려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지 않는가?
역사 기록을 들여다보니, 스파타커스 노예반란은 기원전 73년에 있었다. 처음에는 70여명의 글래디에이터를 이끌고 남부 이태리에서 로마군에 맞섰고, 점점 노예들과 하층민들이 가세하여, 절정기에는 약 120,000명의 무리가 스팔타커스를 따랐다고 하니,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사 실에서 볼 때, 스팔타커스는 세상을 뒤바꿔보려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스팔타커스는 알 프스를 넘어서 이태리를 벗어나 자신들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던것뿐,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통치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영화 스팔타커스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같은 것은 아니다. 역사와 똑같다면 영화가 될 만한 재미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자유라는 메시지를 웅변적으로 전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스팔타커스에는 커크 더글러스, 그의 아내가 된여인 베리니아에는 진 시몬즈, 스팔타커스를 사랑한 (동성애가 아닌) 부하 안토나이너스에는 대장 부리바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토니 커 티스, 영화 내에서 스팔타커스의 라이벌로 나오는 로마의 귀족 크랏수스역에는, 영국의 유명한 연극 배 우로서 작위의 칭호를 받고 1989년 작 고한 로렌스 올리비에가 등장한다. 그의 연기는 귀족답다.
노예 주인공이 로마 원로원의 권력자와 두 가지 점(정치적 대결과 베 리니아에 대한 사랑)에서 대결한다는 설정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작가가 풀어가는 이 야기속 에서는, 탁월한 심리적 갈 등 설정까지 곁들여 설득력있게 잘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 속에는, 자유와 사랑, 정치적 야심과 로마 원로원 내의 음모, 베리니아를 둘러싼 노예 남편과 로마의 권력자 사이의 대결 등이 한 데 어우러져 있다.
이 영화는 필자가 좋아하는 고전중 하나인데,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이 영화 전체에 깔려 있는 주옥 같은 많은 대사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퇴로를 차단당한 대장 스팔타커스가 낙심했을 때, 그에게 용기를 주는 베리니아를 향하여 스팔타커스가 눈물을 흘리며 하는 말, 오, 베리니아, 당신은 내 생명보다 소중한 사람이요. 부하 안토나이너스가 승리한 노예군의 파티에서 일어나 읇는 시 나 돌아가리 (Going Home). 베리니아가 크라수스의 정적의 도움으로 자유의 몸이 된 후 아기를 안고 도망가는 길에, 십자가에 매 달려 처형 당하고 있는 남편 스팔타커스가 볼 수 있도록 아기를 쳐들고 He is free, free, free라고 외치는 마지막 장면. 영화 전체는 자유라는 주제를 흠없이 잘전 하고 있다.
이에 비 하여 최근 리바이벌된 글래디에이터는 수준이 훨씬 떨어진다.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주인공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레셀 크로우가 등장하고, 리얼한 전투 장면을 살 리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으나, 스토리에 무리가 많고 매끄럽지 못하다. 메시지는 어떤가? 스팔타커스의 자유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감독은 그럴 의도가 없는지도 모른다.
독자의 흥미를 위하여 필자는 정답을 감추고 싶긴 하지만, 정답을 말한다면 글래디에이터를 관통하는(잘 보이지 않는) 척추는 가족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은 주후 180년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이던 시기로 잡았다. 이 황제는 교과서를 배울때 기억나는, 명상록으로 유명한 황제가 아닌가? 로마의 영웅인 장군 막시무스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 때문에, 비극적으로 노예로 전락하고, 이후 글래디에이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원형 경기장에서 비 열한 황제와 대결하여 그를 죽이고, 즉 로마를 구하고 생을 마친다.
영화의 처음부터 막 시무스가 고통당하는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그의 기억의 계곡에 어른거리는 이상향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그의 가족이다. 장군 막시무스는 3년 가까이 집에 가 보지 못하고 로마를 지키는 전선에 있었다. 이후 비참한 운명에 떨어진 막시무스는,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것이 아니고,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꿈을 향하여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영화 곳곳에 그 점이 암시된다. 그의 죽음은 그를 마침내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자유라는 주제가 글래디에이터에서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죽음 후에 동료 글래디에이터들이 자유를 얻은 것 뿐이다. 왜 가족을 말하는가? 그것은 현재 미국 사회의 거울이다. 얼굴이다. 붕괴된 가정으로 인하여 가족을 그리워하는 미국인들의 고독을 영웅 막 시무스에게 주입한 것이다.
미국의 가정들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잘모르는 분들은 필자의 말을 어 디선가 확인해 보시라. 그래야 이해가 될 것이다. 이혼율에 있어서 한국도 미국을 뒤따르고 있다니 심각한 일이다.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스팔타커스의 이야기라면, 그 리 바이벌판인 글래디에이터에서는 처절하게 파괴된 내 가족에게로 돌아 가고푼 소박한 소 시민적 이데아를 꿈꾸면서, 초인적인 의지를 가지고 싸우는 로마의 장군을 그리고 있는 것 이다.
그것이 내 해석이다. 다소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임을.
올 연말에 두 영화를 감상하시되, 필자가 말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감상하면, 감동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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