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면 누구나 다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된다. 12월 25일은 엄연히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로서 기독교의 축제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들뜬 상태에서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하여 추수감사절이 지나기 바쁘게 모든 상가와 백화점과 호텔, 요정, 그리고 매스컴에서까지 크리스마스 캐롤이 주야로
울려퍼진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 옛날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12월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 안에 있는 라디오에서 방송이 울려나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의 계절!”이라는 방송 소리를 나오기에 옳거니 기독교방송국에서 성탄 메시지를 전하는구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계속되는 말이 “이 거룩한 계절에 평소에 은혜를 입은 분들에게 백화소주를!”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
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아연실색을 하였다. 성탄 메시지가 아니라 백화 소주를 선전하는 상업 광고였던 것이다.
장사를 하느라면 대목이란 게 있다. 무슨 날이 되었건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겨 가급적이면 더 많은 물건을 팔고자 함이 상술이다. 소위 대목을 노리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어찌 동서양의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특별한 계절을 맞이하였으면 적어도 그 계절의(그 날의) 의미를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지나감이 우리의 인생살이에 있어서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삶이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성서는 때로 인간이 직면하는 ‘극한상황’의 의미를 교훈해 준다. 절대자이신 신(神)의 아들이 추운 겨울날 마굿산의 지푸라기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것은 벌써 순탄치 아니한 삶을 예견케 한다.
길지 아니한 33년의 일생이 시종일관 고통과 아픔의 연속이었으며, 종당에는 십자가라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예수의 탄생은 비극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새삼 “인생의 의의”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체험하는 극한의 상황은 그 고통에만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직면하는 마음의 자세와 또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와 정열에 더 큰 뜻이 있다고 본다. 고해와 같은 인생이라고 푸념하면서도 사람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행동한다.
그것은 오로지 고통을 털어 버리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고 이기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것은 ‘생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괴로워 신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인생은 무위(無爲)하게 지나가고 말 것이다. 돌이킬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말이다.
크리스마스 전(前) 4주간을 대강절(待降節, Advent)이라 하는데,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는 계절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어간에는 ‘인권주간’이 끼어 있다.
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 큰 모순과 죄악을 근본적으로 시정하기 위하여 부득불 神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세상에 탄생하신 것이 크리스마스인 것이다.
그 당시 인권이 어느 정도로 유린되었는가 하면, 신발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매매하였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린 백성들이 자기 자식을 삶아서 먹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아모스 8:6, 애가 4:10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는데 왜 인간들끼리 차별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말살시킨데서야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하겠는가! 인간의 가치성이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달려있거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사람은 밥만 먹곤 못 산다”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하루 세끼 밥 말고 무엇을 또 먹어야 사람답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의 양식’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항상 가난한 사람,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 힘 없어 억울하게 억눌린 사람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모든 인생고의 문제들을 친히 해결해 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권의 책도 남겨놓은 것이 없다. 만일 그의 생애와 행적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두기에는 부족하리라고 말했다(요 21:25).그는 다만 한 마디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므로써 인간다운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남겨주셨던 것인지도 모르고 군중심리에 들떠 흥청거림으로써 성스러운 성탄의 신비를 더럽
히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자숙함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정작 교회에서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내는데 사회가 앞장을 서 법석을 떤다는 것은 모순이요 가관인 것이다. 이제 우리 다 같이 경건한마음으로 뜻깊은 성탄을 맞이하자.
이성철(롱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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