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제
새벽잠을 깨우는 가쁜 숨의 전화가 있었다. UC버클리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아파트 비를 못 내서 쫓겨날 지경이란다. 이따 점심 때 갚을 테니 1,200불만 아들아이 은행 구좌로 급하게 좀 넣어달란다. 얼마나 급했으면 주위사정 생각 없이 그런 부탁할 사이가 아닌 내게 부탁했겠나 싶어 은행 문 여는 시간에 맞춰 2,000불을 입금시켰다. 그렇게 급한 지경이면 먹을 것인들 제대로 있겠나. 아이를 생각하며 부모의 입장이 되어 넉넉히 넣어준 것이다.
무얼 바랐느냐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선, 없는 사람의 답답한 심정을 느꼈을 뿐이다. 내게 여유가 없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마침 있었다. 점심시간에 갚겠다던 말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점심 때 있을 돈이라면 그렇게 급한 지경까지 가지도 않았을 터다.
특별하게 제목을 붙일만한 사람은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이지만 왠지 가까운 친구 같은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완전히 절망상태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일이 좀 있단다. 금방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상태가 되도록 큰 일이냐고 다시 물었다. 주말에 교통사고를 냈는데 꼬마 아이가 달려들어서 피하다가 전봇대를 받고, 차는 완전히 폐차란다. 옆에 앉았던 와이프가 아주 많이 다쳤단다. 보험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 가고 자신은 일을 해야 하니까 간신히 나왔다는 사정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 되어 점심식사도 잘 안 먹는다. 우선은 밥을 먹게 하고, 와이프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당장 차가 없어서 와이프 일도 못 가게 생겼으니 싼 차라도 하나 사야겠구나. 누가 뭐라지도 않았는데 혼자 머리 속이 바빠지면서 얻은 결론이다. 앞 뒤 생각 없이 그렇게 해 줬다. 생기가 나서 씩씩하게 돌아갔다.
생활고에 목숨을 끊는 가장이 생긴다. 그럭저럭 카드를 긁어서 살다가 숨이 턱에 차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다달이 필요한 돈은 안 들어오고 이자에 이자가 붙어 환하게 웃어 볼 새가 없다. 네 장의 크레딧 카드에 갚아야 할 빚이 2만6천불이다. 그 동안 사치하고 펑펑 써대서 생긴 빚은 아니다. 이리 막고 저리 막고 하다 쌓인 빚이다. 누가 이 빚 좀 탕감해 준다면 숨통이 트여 신나게 잘 살아볼 것 같다. 그렇게 해 줬다.
꿈같은 얘기다. 당장 끼니가 간 곳이 없어도 난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 돈의 있고 없음을 떠나 누가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척척 내 줄 사람이 있을까. 정말 답답했다. 부모님이 능력 없어서 학비도 제때 못 내며 간신히 졸업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했나.
돈, 돈, 돈, 가능하다면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딱한 사정 내게 말하는 사람에게 요술쟁이처럼 다 들어주고 싶다. 내가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돈 없어 답답한 지경 많이 당해 봤으니 그런 답답한 지경에 있는 사람 모두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막상 내겐 돈이 없다. 있을 땐 그렇게 살았다. 내가 돈이 없어지더라도 또 다시 예전의 그런 지독하게 답답한 지경까진 가지 않는다. 예전엔 부모님만 바라보며 살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전히 내 주위엔 돈 없어 답답한 사람이 많다. 아직도 내 귀엔 힘없이 삶을 기뻐하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비참한 삶에 얼굴을 펴지 못하는 표정이 보인다. 축 처진 어깨가 유난히 슬픈 사람도 많다. 나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돈의 위력이 이렇게 우리를 꼴 짓고 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어두운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꼴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다. 무슨 방법이든 찾아야 한다. 희망을 주자. 기쁨을 주자. 행복을 체험하도록 해 주자. 우리가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건 아니다. 욕심을 줄이고 점점 마음을 비우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은 기쁨이 되고 행복은 바로 내 삶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풍성했던 내 주머니는 비워지고 더 이상 꺼낼 것이 없어서 조금은 답답해지려 하지만 그래도 난 정말 잘 살아왔다. 바르게 살았다고 자신한다. 이 해가 나의 마지막 해가 된다해도 맨 끄트머리에 난 이렇게 쓰련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았다고. 날마다가 행복했다고. 내 맘은 아직도 큰 부자다. 나는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우수상 수상
국제펜클럽 한국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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