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못난 왕의 하나다. 왕자 시절에는 아일랜드를 통치하러 갔다가 주민들의 반란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으며 형 리처드 왕 재위기간중 형이 십자군 원정에 나갔다 포로로 잡히자 재빨리 왕위를 찬탈했다 형이 풀려나 돌아오는 바람에 석고대죄 후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형 사망 후 왕좌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타고난 무능으로 아버지 헨리 2세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 왕보다 더 많던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잃었다. 결국 전비를 마련하러 무모하게 세금을 걷다가 1215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귀족의 동의 없이는 마음대로 세금을 걷지 못한다’는 문서에 울면서 사인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꼽히고 있는 마그나 카르타다.
영국이 근대 유럽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못난 왕을 많이 둔 탓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독교권에서 가장 똑똑한 바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제임스 1세, 왕권 신수설을 고집하다 신하들에게 도끼로 목이 잘린 그 아들 찰스 1세, 왕정 복귀로 간신히 왕좌를 찾았으나 허랑 방탕으로 일생을 보낸 찰스 1세의 찰스 2세, 즉위 3년 만에 명예혁명으로 권좌를 잃은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 등 17세기를 주름잡았던 스튜어트 조의 왕들은 하나 같이 못난이였다.
그러나 이들 덕에 영국 민주주의는 꽃 피었고 그 후에는 누가 왕이 되든 별 상관없이 의회와 내각이 책임지고 정치를 이끌어 가는 제도가 확립된 것이다.
영국의 전통을 이어 받은 미국도 비슷하다. 미 건국 후 지난 200년 동안 40여명의 대통령이 백악관을 거쳐갔지만 그 중 잘난 대통령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나머지는 대부분 그저 그렇거나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지금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가 된 것은 의회, 언론, 사법부 등 대통령이 웬만큼 잘못 해도 이를 바로 잡아줄 견제 세력들이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존 왕과 대조적으로 유럽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인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임기간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로 군림했을 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역사, 과학 등 서양 정신문명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기원전 429년 그가 전염병으로 급서하자 아테네는 급속히 기울기 시작,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진 후 다시는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한 인물의 능력에 모든 것을 의지한 나라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준다.
이런 원리는 국가뿐 아니라 기업에도 같이 적용된다. 지금부터 25년 전 1978년 11월 망해가던 크라이슬러 회장으로 취임한 리 아이아코카는 연방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하고 미니밴 등 히트 상품을 내놔 불과 6년만에 사상 최대의 순익을 내는 업적을 이뤘다. 그러나 크라이슬러의 영화는 아이아코카와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그가 은퇴한 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크라이슬러는 다임러 벤츠에 합병 당했으며 지금까지 고전하고 있다. 다임러 크라이슬러의 시가 총액은 합병 전 벤츠 혼자의 총액만도 못하다.
나라 은행 홍승훈 행장 사임 후 벤자민 홍 이사장이 행장 대행으로 나섬으로써 ‘벤 홍 체제’가 부활됐다. 벤자민 홍 행장은 망해가던 미주은행을 나라은행이란 이름으로 되살린 ‘한인타운의 아이아코카’다. 은행인으로 그의 능력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행장의 복귀는 한 사람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나라은행의 취약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이 책임경영을 할 경우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어 효율적 업무추진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거나 유고가 생길 경우 이에 제동을 걸거나 대체할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아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목숨이 긴 기업은 호시절에 잘 나가는 기업이 아니라 어려울 때 살아남는 기업이다.
나라은행은 지난 9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난 성공이 앞으로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번 홍승훈 행장의 갑작스런 사임과 이를 둘러싼 소동은 은행의 장기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제도적 안전장치가 필요함을 알리는 경종이라 본다.
민 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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