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아
교회에 새로 등록한 신자가 복도에서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한다. 선생님, 저 정옥이예요. 선생님이 고 3때 제 담임이셨어요. 어쩐지 낯이 익다했더니 내가 가르친 제자였다. 나는 예전의 제자들을 만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사명감에서 선생 노릇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집가기 전 결혼자금을 마련하느라 한 교편생활이었다. 수업은 뒷전이고 아이들과 수다 떨기를 더 좋아했었다. 방과후엔 학생지도를 핑계삼아 공짜로 극장 드나들기를 즐긴 부족한 선생이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와서 이른 결혼을 한 정옥이는, 그래서 그런지 우리아이보다도 큰 아이를 두었다. 정옥이의 아들은 작년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는데 내 아들이 들어간 듯 내 어깨가 으쓱했었다. 예전의 제자는 모자란 선생을 아직도 깍듯이 모시는데, 내가 과연 진정한 스승이었을까? 몸둘 바를 모르겠다. 정옥이의 남편은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내 남편을 ‘사부님’ 이라며 극진하게 대하고, 정옥이의 아들은 내 아이를 ‘엄마 선생님의 아들’이라며 동생처럼 보살핀다. 며칠 전엔 정옥이의 오빠가 하는 식당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 오빠는 어찌나 인사를 하고 또 하시는지 일본사람들처럼 인사를 여러 차례하며 헤어졌다. 엉터리 선생이었을 망정, 이역만리 이곳에 와서 잘 나가는 제자를 만나니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니다.
정옥이는 같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성경공부도 같이하면서 함께 늙어간다는 말을 실감케 하고 있는데, 내게 행복한 만남의 기쁨을 주고 있다.
몇 달 전에 시작한 피오피코 코리아타운 도서관의 문학강좌도 요즈음 나를 행복하게 하는 행사이다. 고달픈 이민생활을 하는 이들이 과연 문학에 관심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 열기가 뜨겁다. 그 행사를 도우면서 글 쓰는 이의 책임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인터넷으로 인해 점점 파괴되어 가는 언어가 안타까워, 바른 글 쓰기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좋은 실습의 장소가 되고 있다. ‘문학’ 이라는 공동 화제가 있어서인지 어느 만남보다도 편하고 재미있다.
수강생들 중엔 더러 내 글을 읽는다는 독자들도 계셔서, 여러 각도의 평을 접할 수 있으니 내게 많은 도움이 된다. 문학의 초보자를 위한 강좌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위해 개설된 강좌가 아닌가 하여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시험이 전제되지 않은 공부이기에 더 부담이 없고 행복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은 늘 행복하다. 소설을 쓰는 P와 수필을 쓰는 H를 만났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H는 부지런한 사람. 새로운 전공의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까지 보는 골치 아픈 정식 공부와는 담을 쌓은 나는 부럽기만 하다. 학기말 시험을 무사히 끝내서 홀가분하다며, 기념으로 점심과 커피까지 풀 코스로 한턱 쏘았다. 똑똑한 그녀는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외유내강. 나이는 아래여도 단단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소설가 P는 중년임에도 통통 튀는 탄력을 간직한 귀여운 여인. 자그마한 그녀를 보면 같은 여자끼리인데도 보호본능이 생긴다. 이참에 커밍 아웃을 할까? 농담했다. 글 쓰기에 대해 인생에 대해 건전한 대화가 오고간,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만남이었다. 집에 가서 저녁 지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많고 많은 만남 속에서 가끔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만남들이 있다. 남을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만남은 씁쓸하다. 몇 년 전에 갔던 분위기 좋은 빅베어 산장에서의 문학캠프. 옆방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험담 시리즈 때문에 소설가 P와 나는 밤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낮 시간의 고상했던 문학행사의 분위기를 깨던, 실망스럽던 기억. 그 후론 가십(gossip)의 여왕으로 불리는 몇몇 사람들과의 교류는 조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십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여왕의 시종 자격은 충분하다.
살다보면 잘못된 만남보다 행복한 만남이 더 많다는 것에 안도한다. 여왕의 첫째 시종이었을 망정 이제부터라도 행복한 만남만을 만들고 싶다. 헤어지기가 아쉬운 만남, 집에 돌아가서도 빙그레 웃음을 떠올릴 수 있는 만남, 다시 만나고픈 기대를 주는 만남의 주인공들이 서로 되었으면 한다. 남을 배려하는 만남, 이타적인 만남, 그 행복한 만남 들이 쌓여 늙을수록 고운 사람이 되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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