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국정이 파행하고 있지만 파국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통령 측근 비리를 특별검사에 맡겨 수사하자는 국회 결의를 노 대통령이 거부하자 야당이 국회 참여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빚어진 작금의 사태를 놓고 내린 낙관적 진단이다. 국사가 비틀걸음을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파편처럼 깨진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만약 노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큰배의 운명을 맡은 선장이라는 의식에 투철하고 이 나라가 처한 국내외 상황인식을 좀 더 진지하고 정확하게 관찰했다면, 그렇게 낙관적인 견해를 밝힐 수는 없으리라는 판단에서다.
노 대통령 자신이 인정한 ‘파행의 국면’을 전제로 해도 사태는 심각하다. 온 나라가 들썩이게 된 단초는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들고 나온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비롯됐다. 한 달여 전 노 대통령은 자신을 20여년 동안 보좌해 온 한 측근의 ‘불미스런 비리’로 눈앞이 캄캄해졌다면서 훼손된 도덕성을 갖고는 더 이상 국정수행이 어려운 만큼 재신임을 묻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한데 검찰이 밝힌 비리 규모는 겨우(?) 11억원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증폭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만한 비리를 가지고 임기를 건 도박을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설명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그 정도는 돈이 아니다. 전임 대통령들이 수천억을 감추다 들통이 났고, 정권 실세들이 몇 백억을 떡 주무르듯 해온 판에 11억이라는 돈, 그것도 대통령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게 아니라면, 천신만고 끝에 잡은 대권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를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가 무언지 궁금해했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찰이 야당 대선 자금을 뒤지면서 100억이라는 거액의 검은 돈 거래가 포착됐다고 발표하자 ‘아하, 저래서 난리법석을 떨었군’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기에 이르렀다. 자기 쪽 비리는 축소하고 야당만 올가미 씌우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이 부쩍 동하게 된 것이다. 결국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를 위한 특검 설치를 국회가 다수 표로 결정했지만 노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버리자 정치대결이 가속화 됐다.
지금 한국의 정국은 파행 아닌 파국이다. 정권과 야당의 대치는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와 같다. 그 접근도가 하루하루 간격을 좁히고 있다. 한나라당은 의원직 사퇴를 결의하고 노 정권과의 백병전을 벼르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공공연히 들고 나온다. 한마디로 갈 때까지 간 꼴이다.
국회 1당인 한나라당이 국회를 보이코트하고 장외로 뛰쳐나간 일은 잘한 짓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3분의2의 절대 다수로 가결한 특검안을 거부한 것이 더 문제가 있다. 헌법 정신과 도덕적 차원에서 노 대통령은 아주 위험하고 떳떳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꼴이다. 특검 대상이 누구인가. 바로 자신의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고 그 연장선에서 재신임까지 묻겠다고 한 측근비리 사건이 아닌가. 그렇다면 법무장관과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적인 특검에 이 사건을 맡기는 것이 정치적, 도의적으로 옳은 일이 아닌가.
게다가 경제는 어떤가. 경제 인구를 2,000만명으로 잡을 때, 그 5분의1인 400만명 정도가 신용불량자로 떨어졌다.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파산자들이다. 실업률이 나날이 늘고 그 대다수가 대졸의 고학력자들이다.
IMF 때보다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민초들의 아우성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국가를 이끌어 가는 정치지도자들의 통합기능은 이미 죽었다. 대결과 반대와 이기적 제몫 챙기기에 나선 집단 앞에 백기를 들었다. 핵 폐기장을 놓고 벌어진 전북 부안 사태는 정부가 존재가치를 잃은 해방구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권은 새만금 등 환경문제에서부터 이라크 파병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정책을 둘러싸고 야기된 이해갈등을 푸는데 실패했다. 하다 못해 길거리 노점상마저 화염병을 던지며 공권력을 무력화시켰다.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무리를 지어 떼쓰는 쪽만이 승리자로 떠오르는 사회 아노미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필시 국가 위기의 서곡을 지나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미 발을 들여놓은 거나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과거에도 이보다 더 어려운 때가 많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는 노 대통령의 시국진단은 국가통치의 자신감에서인가, 아니면 신뢰추락에 대한 자기 변호인가. 그의 집권 10개월이 시행착오의 연속이란 사실에서 자신감은 어불성설이다.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이 새삼 문제되는 시절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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