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정 교수, 일리노이 주립대학
안팎으로 유난히 혼란스러웠던 이 해의 끝자락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감사절과 성탄절을 앞두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미국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리고 미국과 관련된 일들 중에도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은데, 고국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불안하고 불편하고 안타까운 소식들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얘기다.
박봉을 비관하여 목을 매는 대학 시간강사에서부터 생활고 때문에 자녀를 죽이고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비정의 30대 주부, 학업 부진을 비관하여 동반자살 하는 여고생들, 카드 빚을 못 갚자 어머니와 아들을 살해하고 부인까지 죽이려한 30대 회사원, 쌍꺼풀 수술이 잘못 되었다고 자살하는 젊은 여성, 딸의 카드 빚 때문에 목숨을 끊는 60대 가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해서 자살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같이 죽어버리는 신세대들에서부터,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분신과 할복을 택하는 근로자들, 대학입시와 수능시험에 짓눌려 투신하는 수험생들, 비리를 조사 받다가 목을 매는 공무원, 도박으로 돈을 잃고 시위하다가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 공부가 힘들다고 목을 매는 명문대 학생, 그리고 강제 출국에 몰리자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금년 내내 한국으로부터 자살사건의 보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2002년 한해 동안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숫자는 근 1만5,000명에 달해 하루 평균 약 40명이 자살했다는데 금년에는 그 숫자를 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한국의 자살율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고 한다. 특히 자살은 한국의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원인 중에서 두 번째라고 하니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이 험한 세상에서 교통사고나 질병, 그밖에 수많은 불의의 사건,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 자살이 이 모든 사망원인 가운데 두 번째라니…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최근 들어 자살이 전염병처럼 크게 번지게 된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외환위기 이후 축적된 경기침체로 인한 새로운 빈곤층의 증가와 허술한 사회보장체계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고, 불건전한 인터넷 이용의 확산 및 정보 남용과 오용의 급격한 증가, 파행적 교육현실 속의 사회적 압력의 가중, 가족 간 의미 있는 대화의 시간과 공간 축소 현상 등도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자살하게 되는 직접적 동기와 이유는 이렇게 다양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한국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고 자살율이 높다는 사실은 한국사회 전반에 아직도 생명 경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통적으로 수직적, 계층적 사회구조를 이루어온 한국사회는 아직도 모든 생명의 보편적 고귀함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소위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사람의 생명이나 가난하고 찌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똑같이 고귀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얘기고 또 논란이 될 수 있는 얘기지만, 일찍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보편적, 수평적으로 인식해 온 구미에 비해 한국사회는 인명존중 면에서 뒤져왔다고 생각한다. 미국생활을 통해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가령 조그만 공사를 해도 주위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철저한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이들의 생명중시 가치관인 반면에 한국에서는 무지막지한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통행인들이 그 속을 헤집고 다니도록 내 버려 두는 것이 한국사회의 안전불감증, 아니 생명경시 현상이다.
모름지기 과학기술이 진전되고 물질문명이 발전될수록 인류는 생명중시와 인간존중이라는 가치관을 더욱 굳건하게 다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 자살하는 사람이 많고 또 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한국사회가 생명경시라는 구시대의 유산을 털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전 국민이 휴대전화를 하나씩 다 갖고 다닌다고 자랑한들 무엇하나.
생명에 감사할 줄 알아야겠다. 이번 감사절을 맞아 여러 가지 감사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감사를 느껴 보자. 내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내 가족의 생명, 내 이웃의 생명, 그리고 모르는 이들의 생명까지도. 각자가 각자의 생명을 스스로 감사하고 또한 남의 생명을 존중할 때에 인간이라는 존재, 즉 인간성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따르게 되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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