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열린 뉴욕시 마라톤 대회 뉴스를 보다가 감동적인 장면이 눈에 띄었다. 참가 번호 49816번 번호판을 목에 매달고 목발을 짚은 뚱뚱한 아주머니가 결승선을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가도에 늘어선 환영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감격으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대회 다음날인 3일 정오께.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29시간45분 걸려 완주한 그는 이번 대회의 당당한 꼴찌로 기록되었다. 조 코플로위츠라는 50대 중반의 이 여성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을 앓는 장애인이었다. 대회 조직위의 배려로 일반 참가자들 보다 4시간 일찍 출발했지만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하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20여 시간 늦게 도착했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와서 몸이 말을 안 듣는 병이라고 한다. 우리 몸은 복잡한 신경망의 지배를 받는데, 신경섬유를 싸고 있는 외피가 흐물흐물 녹아 내리듯 파괴되면서 신경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직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데, 일반적으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 감각이 둔해지며,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숨도 못 쉬게 되어서, 환자들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가, 인공호흡기를 하고 살다가 결국은 죽어 가는 병이라고 한다.
코플로위츠라는 여성의 마라톤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지가 축 쳐져서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그래서 납덩어리 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몸에 힘이 쭉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그런데 다발성 경화증만이 아니다. 정신적 경화증이 있다. 삶의 어느 중간에 권태라는 병균이 찾아들면 우리를 지탱해오던 의욕의 망이 파괴되고, 그리고 나면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경화증, 무력감이 찾아든다. 가을이 되면서 그런 ‘환자’들이 유난히 주위에서 자주 눈에 띈다. 주로 중년의 주부들이다.
삶을 물의 흐름에 비유하면 성장기는 깊은 산 속 계곡의 물에 해당될까. 가파른 계곡을 따라 곤두박질 치듯 세차게 흐르느라 지루할 틈도 없다. 이어 물은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며 지향점을 가지고 줄기차게 흐르고, 그러다 중년쯤 되면서 바다로 흘러들게 된다. ‘망망 대해’는 한 평생 고단했던 삶을 접고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는 무대이지만 그것이 종종 무력감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바인의 한 주부가 좋은 예이다. 두 아이를 모두 대학에 보내고 빈둥지에 남은 그는 요즘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운 무력감에 빠져있다.
“하루 종일 소파에 축 쳐져서 보내는 적도 있어요. 몸을 추스려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의욕이 생기지를 않아요”
막내가 떠나면서 갑자기 엄마로서 할 일이 없어진 데다 생리적으로는 갱년기를 맞아 우울증까지 겹친 결과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백지 같이 무한정 펼쳐지는 망망한 시간이 무섭다”고 했다.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하면 보통 다량의 스테로이드를 투여한다. 스테로이드가 마비된 신경조직을 풀어 몸의 기능을 소생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경화증에도 스테로이드가 필요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통한 호기심이 스테로이드가 될 수 있다.
한국의 KBS1-TV는 ‘퀴즈, 대한민국’이라는 장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지난해 퀴즈왕으로 엉뚱한 사람이 뽑혔다. 40대 중반의 주부였다. 난다 긴다하는 젊은 영재들이 맞붙는 그 프로그램에 가정주부가 도전해 5연승을 하고 5,000만원의 상금을 따냈다. 그 주부가 말했다.
“가정주부는 무력감에 빠지기 쉬워요. 그럴수록 자신을 컨트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 대책을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데서 찾았다고 했다. 50 넘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여성들,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여성들, 마라톤을 시작하는 여성들도 같은 맥락이다.
삶은 정신력의 싸움이다. 얼마나 오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느냐가 질적인 수명을 결정한다. 정신적 경화증에 걸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다시 산속 가파른 계곡의 물이 되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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