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성탄절 휴가를 즐기던 뉴욕 금융가의 거물들이 투덜거리며 로어 맨해턴에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시티, 체이스 맨해턴, JP 모건, 뱅크 오브 아메리카, 뱅커스 트러스트, 뱅크 오브 뉴욕 등 6개 은행 대표들이었다.
윌리엄 맥도너 뉴욕 FRB 총재가 급히 은행 대표들을 소집한 것은 외환위기에 허덕이는 한국을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맥도너는 월가 은행들의 팔을 비틀었다. 그는 마지못해 불려나온 은행장들에게 한국 상황이 긴급하다. 미국은행들이 나서서 도와 주라고 말했다.
도도하기만 하던 월가 뱅커들은 맥도너 총재의 말을 듣기로 했다. 월가에서는 FRB에 반대하면 실패한다는 공식이 있다. 아무리 큰 은행이라도 중앙은행의 정책에 반대했다간 살아남기 어렵다. 맥도너의 지시(?)로 월가 은행들은 한국의 단기 외채 만기를 연장해 주기로 했고, 이어 유럽과 일본 은행들도 미국 은행의 뒤를 따랐다. 한국이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어쩌면 뉴욕 FRB의 영향력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뉴욕 FRB는 지하에 전세계 금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국 국채(TB)를 직접 거래함으로써 시장을 조정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에 대한 총괄적인 감독 기능을 갖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이끄는 워싱턴의 FRB 본부는 금리 결정 등 거시 정책을 총괄한다면 뉴욕 FRB는 국제 금융시장의 감시자이자 참여자로 기능을 하고, 뉴욕 총재는 FRB내 2인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87년 ‘블랙 먼데이’로 뉴욕 증시가 폭락했을 때 당시 제럴드 코리건 뉴욕 총재는 월가 은행에 전화를 걸어 돈을 풀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그 덕분에 사상 최대의 주가 폭락이 하루만에 마무리됐다. 살로먼 브러더스에서 채권 사기사건이 터지자 코리건 총재는 경영진 경질을 요구, 존 굿프렌드 회장이 사임해야 했다.
98년 헤지펀드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파산 위기에 빠지자 맥도너 총재는 은행들을 불러모아 구제금융을 주도록 강하게 요구, 시장 붕괴를 막았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철저한 ‘관치금융’이 미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뉴욕 FRB 총재 자리에 40대 젊은 관료출신이 영입됐다. 미국 중앙은행은 나이를 이유로 은퇴한 맥도너 총재 후임에 티모시 가이스너 전 재무부 차관을 임명했다. 나이는 42세. 미국 언론들은 그의 나이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장유유서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동양적 관점으로는 가히 놀라운 일이다.
오는 11월 중순에 취임할 가이스너 총재 지명자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재무부 차관을 역임,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98년 러시아 국가파산을 능란하게 처리했다. 그의 이런 장점이 FRB 2인자로 선택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한국 시중은행에서는 조흥, 한미 은행에도 40대 행장이 나와 젊은 CEO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재경부와 한국 은행의 최고 또는 2인자 자리에 30대 또는 40대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50대 대통령이 집권,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세대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관료 사회에서 젊은 상관을 마음속으로 승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선 국가 또는 기업, 은행 경영에 나이가 거의 문제되지 않는다. 잭 웰치의 배턴을 이어받아 제너럴 일렉트릭(GE)의 CEO를 맡은 제프리 이멜트 회장, 세계 최대 회사인 제너럴 모터스(GM)의 CEO 릭 왜거너 사장이 40대이고, 미국 5위 은행인 뱅크원의 제임스 다이먼 회장도 40대다. 그렇다고 이들 회사에 CEO보다 나이 많은 임직원들이 연령을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선 나이보다 시스템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90년대 후반에 총리까지 지낸 미야자와 기이치를 대장상으로 모셔야 할 정도로, 아시아 지역은 유교적 연공서열이 사회의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을 리드하는 뉴욕 FRB 수장에 40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한국은 배워야 할 것이다.
김인영/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inkim@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