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라는 돌풍이 한국의 정치판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난맥상을 돌파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내놓은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안에 대해 처음에는 야당측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다가 반대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반대로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자신의 재신임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런 판을 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리둥절해질 뿐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국민투표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국민투표는 의회에서 가결된 사안의 가부를 국민들에게 물어 최종 확정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정부가 의회를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회의 협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될 때 의회를 건너뛰어 국민을 직접 상대하여 협력을 구하는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또 현실적으로는 집권자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절차로 국민의 형식적 동의를 얻는 방법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결정한 당사자는 국민이 아니라 정부이다. 정부가 어떤 사안에 대해서 국민에게 가부를 묻겠다고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즉 국민투표는 정부가 필요해서 하는 것이며 정부가 필요해서 하는 이상 정부 쪽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될 때 국민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대부분의 국민투표는 가결되었다.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공화정을 폐지하고 황제가 된 것이나 히틀러가 총통이 된 것도 국민투표가 가결시켰다. 3공 시절 박 대통령의 3선과 유신헌법도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정치적 난맥상을 국민투표로 해결하고자 한 노 대통령의 전략은 기막힌 묘수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YS와 DJ를 정치 9단이라고 하지만 노 대통령의 수는 전임자들의 경지를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번쩍이는 묘수는 그를 남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검정고시와 사법고시를 거쳐 정계의 기린아로 등장시켰고 노풍을 일으켜 대통령까지 되게 했다.
취임 후 각종 현안에서 우왕좌왕하는 듯 보이면서도 청와대와 국정원, 국영방송 등 권력과 사회 핵심분야에 이른바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심어나갔다. 또 미국 가서는 이 말 하고, 일본 가서는 저 말 하는 것이 횡설수설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다.
지금 정계는 4당이 난립한 여소야대 구도이다. 여소야대 중에서도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통합신당은 소수당에 불과하다. 내년 총선을 통해 판도가 약간 달라지게 되겠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여당이 제 2당이 될 가능성도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국민투표 제안으로 이 4당 구도의 의미는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국민은 친노와 반노로 갈라지게 되며 찬반이 팽팽한 대립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의회의 소수당에 불과했던 여당의 기반이 국민의 절반으로 확대되며 의회 다수당인 야권 3당의 기반이 국민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여기에 국민투표 과정에서 지난번 대선 때처럼 노풍의 돌개바람이 불면 재신임은 가결되고 이어 총선에서 여당의 눈부신 진출이 명약관화해 진다.
야권이 국민투표를 정략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국을 소수 정부가 주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에는 이에 대한 정치적 전략이나 실력이 부실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승부수에 대한 대안이 없다. 또 국민투표가 실시된다고 할 때 또다시 몰아칠지도 모르는 노풍에 대한 대응책을 야권이 개발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개헌 내용을 국민투표에 부칠 때 헌법 몇 조를 어떻게 바꾼다는 것처럼 내용이 분명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신임 국민투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재신임 여부를 묻는다는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 무조건 노 대통령을 지지하느냐는 식의 투표는 단일후보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대선이 되기 때문이다.
또 아직도 대통령의 신임투표에 대한 헌법상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이상 합헌 여부가 확정된 후에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투표 후 결과에 따라 위헌 시비가 제기된다면 한국이 무정부 상태에 직면할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영 본보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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