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6일 신한금융지주회사가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고, 곧이어 29일 우리금융그룹이 뉴욕에 상장했다. 이로써 이미 상장해 있는 국민은행과 함께 한국의 메이저 3개 시중은행이 세계 최대 증권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은행 경영진들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와 미국의 회계기준(GAAP)을 통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정경 유착의 고리를 형성했던 은행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지배구조를 갖추고 그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수조원의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살려낸 은행들이 국제 기준을 맞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대주주인 정부가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지분을 유가증권화해서 큰 시장에서 좋은 가격으로 팔기 위해 NYSE에 거래를 텄다는 점이다.
국내 시장의 규모가 작아 대량의 정부 지분을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풍부한 자금이 거래되는 해외 시장에 문을 두드리는 것이 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문제는 정부 지분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국민 경제의 심장인 상업은행의 경영권을 외국에 내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우려에 대해 지주회사의 뉴욕 상장을 며칠 앞두고 팬아시아 합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이덕훈 우리은행장은 외국 자본의 시중은행 경영권 참여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이 행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결제수단을 지닌 상업은행은 자본을 축적하고 자원을 분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도 면에서 치안이나 국방과 유사하다며 중요한 순간 또는 경제가 어려울 때 외국인 소유 구조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국에 2년 앞서 외환위기를 겪은 후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멕시코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 정부는 경제위기 후 금융구조 조정을 단행하면서 5대 은행의 해외매각을 제외했다. 그러나 공적자금 회수과정에서 금융부실이 해소되지 않은 은행을 매각해야 했고, 결국은 5대 은행마저 해외에 팔 수밖에 없게 됐다.
선진 7개국(G7) 가운데 메이저 은행의 경영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준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유럽 연합(EU)이 단일 통화에 단일 경제권을 형성했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은행만큼은 지키고 있다.
80년대에 미국 시티그룹이 어려울 때 아랍계 자금을 얻어 썼지만, 왈리드 왕자는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묵계를 아직도 지키고 있다. 10년 이상 금융 부실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일본은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붓고 은행 합병을 단행하면서도 주요 은행을 지켜나가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직후 뉴욕에서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제조업을 매각할 것인지, 은행을 매각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때 제조업을 우선 내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돈 적이 있다. 제조업은 외국에 팔아도 공장이 현지에 남고 근로자는 현지 국민을 쓰지만, 은행은 자본재를 국경 넘어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관치금융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가 위기시 정부와 중앙은행, 상업은행이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1929년 대공황 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시중은행이 삐걱거리면서 위기가 가중된 것은 전형적인 예다. 한국의 경우 메이저 시중은행이 해외에 매각될 경우 위기 시에 정부와 보조를 맞추지 않아 위기를 가중시킬 가능성이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 IMF(국제통화기금)은 한국의 시중은행 두 개를 매각할 것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마지못해 이를 들어줬다. 그 결과로 제일은행만 미국 펀드에 매각됐지만, 서울은행은 국내 은행에 넘어갔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최근 외환은행이 외국계 론스타에 인수됐다.
한국 은행들의 뉴욕 증시 상장은 정부의 은행 지분매각의 서곡이다. 국내 산업자본의 은행 경영 참여에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외국 자본에 은행을 내주는 것은 더 어려운 상황을 촉발할 수 있다. 은행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국내 자본 참여의 물꼬를 터주는 방안이 진지하게 논의될 시점에 와 있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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