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초 워싱턴을 방문한 일본 재무성 관리들이 국제 금융시장이 로버트 루빈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손짓 하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불평했다. 루빈 장관이 엄지손가락을 들면 엔화가 상승했고, 그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면 엔화는 바닥을 모른 채 떨어졌다.
97년 아시아 위기가 터지고 이듬해에도 그 불길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일본 엔화는 1달러당 150엔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일본은 엔화 절하를 막기 위해 보유 외환 200억 달러를 풀었지만, 시장은 일본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때 일본 재무성은 미국이 개입해 달라고 간청했다. 6월 중순 미국이 20억달러를 풀었다. 그러자 가라앉던 엔화가 마침내 진정되고 말았다. 일본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도 움직이지 않던 국제 외환시장을 미국이 얼마 안 되는 돈을 풀어 제어한 것이다. 일본이 의아해 한 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미국이 푼돈으로 시장을 제어한 것은 당시 루빈 장관의 엄지손가락이 위로 치켜져 있었고, 일본이 10배나 많은 돈을 물 붓듯 썼는데도 시장이 내려갔던 것은 루빈 장관의 손가락 방향이 아래로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 외환시장에는 하루에도 2조달러의 뭉칫돈이 컴퓨터 온라인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이중 98%가 허수의 거래이고 실제 돈이 오가는 거래는 1%를 약간 넘는다. 미국 정부는 바로 이 허수의 거래를 움직이고, 미국 이외의 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영역은 1%의 실거래일 뿐이다.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오피스 룸에 포진한 외환 딜러들은 미국 재무부와 중앙은행(FRB)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며 투기판을 벌이고, 각국 정부는 이 투기군단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해 국고를 풀었다 닫았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미국은 ‘시장의 원리’라고 부른다. 경제학의 초보자도 시장이라 함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설파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 협상에서 ‘시장’이라는 말을 쓸 땐 워싱턴 행정부와 뉴욕 금융시장이 하나가 돼서 움직이는 글로벌 시스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은 또다시 아시아 국가에 ‘시장 경제’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일 아랍에미레이트(UAE)의 두바이에서 열린 선진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에서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은 아시아 국가가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며 유연한 환율 시스템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다른 6개국이 마지못해 미국의 뜻에 동의했다. 미국 재무부가 또다시 시장에 신호를 보내고 있고, 이에 한국을 비롯, 아시아 국가들에 통화 절상의 비상이 걸렸다.
미국 재무부가 중국과 일본, 한국에 대해 시장 원리를 요구한 것은 아시아 국가가 외환시장에 ‘보이는 손’(visible hands)으로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달러 약세가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위안화를 달러화에 고정시켜 운영하고, 일본과 한국은 막대한 보유외환을 풀어 자국 통화 절상을 막고 있다는 게 미국의 불만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말 현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5,551억달러, 중국은 3,565억달러, 한국 1,380억달러인데 비해 미국은 805억달러에 불과하다. 올 들어 미국이 달러 절하 정책을 채택하면서 유로가 20% 절상됐는데, 엔화와 원화는 좁은 변동폭을 유지하고, 위안화는 고정돼 있는 것이 바로 외환보유액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미국은 6년 전 아시아 위기 때에도 시장경제를 요구했다. 그땐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시장이 아시아 통화를 폭락시켰고, 지금은 절상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강한 달러’ 정책을 쓸 때 미국은 아시아 국가에 절하를 요구하더니만, 달러 약세 정책에는 정반대의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호르스트 쾰러 총재가 미국을 비롯, 선진국들이 국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환율 시스템 변경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따끔하게 비판했지만, 미국은 들은 척도 않고 있다. 국제금융 시장에도 ‘보이는 손’에 의한 미국의 일방주의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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