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 임영록
1714 University Ave. Honolulu
전화로 그가 불러 준 주소이다.
일이 4시에 끝나니까 그 시각에 맞추면 보여 줄 수 있어요.
그녀는 그의 영어가 약간 서툴게 느껴졌고 한국말의 억양은 왠지 강원도 사투리가 조금 섞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와이로 이주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리를 잘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UH (하와이 대학) 정문 근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에요 라며 바쁘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쿠아 색깔의 갑옷 치마를 걸친 반라의 청동상을 가게 앞에 내놓은 ‘타이의 추억’ 이라는 곳의 바로 옆 가게라는 그의 설명이, 그녀는 자신에게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맨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약간 당황한 듯 귀찮게 내 뱉은 말 때문이었다.
하와이 대학 구내 게시판 광고에Kim 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고 한국 사람일 것 이라는 단정을 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전화를 하였지만 그의 반응은 오히려 정반대인 것 같았다.
한가하던 거리가 스쿠버 다이버가 참았던 숨을 뱉어 내듯 많은 학생들로 북적거리며 시끄럽게 주말의 거리를 메웠다.
스타벅스 커피샾, 세븐 일레븐 편의점, 스포츠 칵테일 바, 극장과 음식점, 중고서점 및 음반점, 인터넷 카페, 은행...
보이는 가게 마다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량에서 품어 내는 출력 높은 랩송의 베이스 음이 상가의 유리창을 흔들어 대었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기들의 일에 열중이었다.
킹 스트릿과 유니버시티 에브뉴가 만나는 부분의 코너에 위치한 조그만 상가 한편에 위치한 ‘타이의 추억’은 그의 말대로 점포의 현관문 높이 만한 청동상이 밖에 놓여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망한 듯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부채춤을 추는 소녀처럼 가느다란 몸매의 청동상은 긴 손톱의 손가락을 부채처럼 펴고 얼굴 앞을 가리우고 있었다. 도톰한 가슴을 다 내어 놓고 눈은 요염하고도 날카로운 고양이 눈을 하고 있어 긴 손톱의 날카로운 끝이 남태평양 오후의 나른함을 톡톡 터트리고 있었다.
윈도우에 비치는 가게 안에는 형형색색의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린 목걸이나 귀걸이 등의 악세사리와 어두컴컴한 내부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불상과 갖가지 모양의 청동상 때문에 그녀는 기분이 음산해졌다.
‘Aloha Tatoo’ 알로하 문신.
‘타이의 추억’옆에 위치한 그가 일하고 있다는 가게였다.
옆 가게와 음산함을 공유하며 입구에서 부터 살갗이 타는 냄새가 나는 듯 했다.
그녀는 그냥 돌아갈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혼다 어코드 자동차 96년 $2500, 네온 자동차 98년형 $2,000, 노트북 컴퓨터 $300, 책상 $50, 소니 평면 티브이 20’ $100, 셀리 침대 $300 그 외 많이 있음’ 이라는 차를 비롯한 필요한 물건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파는 광고가 마음에 걸리고 이런 곳에서 한국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야릇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녀가 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서니, 손님으로 보이는 백인 학생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카다로그를 보고 있고, 천장부터 바닥까지 벽에 붙여져 있는 보드에는 크고 작은 원색의 그림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하고 그림 하나하나 마다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작은 쌍하트 $40, 핏빛의 장미 $70, 조금 큰 장미에 꽃잎 하나 $95, 용 이나 호랑이$150, 독거미와 거미줄이 크기에 따라 $50, $75, $100, 그리고 만화에서 보던 이상한 형상과 무늬 또는 여러가지 모양의 글자에 스티커로 덕지덕지 가격을 매겨 놓고 있었다.
‘Cash Only’ 라는 낡은 사인이 붙은 카운터 너머로 정면 벽에는 문신 사진을 확대한 대형 포스터가 서너 장 붙어 있었다.
용의 그림이 엉덩이에서부터 올라와 가느다란 허리를 넘어 등허리까지 뒤엉켜 올라 붙어 있고, 머리를 한 손으로 감아 올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기모노를 팔 한 쪽에 걸친 일본 여성의 에로틱한 뒷 모습을 찍은 포스터에 자꾸 눈이 갔다.
푸른 비늘로 덮여 한기가 느껴지는 섬뜩한 용의 그림이 풍만한 여체의 곡선을 타고 흡착된 모습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둥근 산에 천둥 번개가 굉음을 내며 번쩍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뱀의 혀가 날름 거리며 자신의 손등을 핥는 것 같은, 바라 볼 수록 야릇한 매력과 꺼림칙한 불안감이 뒤범벅되어 그녀의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빨리 이 곳을 빠져 나가자. 징그럽고 더러운 곳에서 나가자. 라고 되뇌며 범행 현장에서 빨리 도망쳐 버리고 싶은 범법자 같은 심정이 되어 가게를 나가려다가 그녀는 청소를 하고 있는 문신이 온 팔뚝에 그려진 프로 레스링 선수처럼 거대한 덩치의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씽긋 웃으며 킴을 찾으러 왔느냐며 곧 나올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험상궂은 거대한 덩치의 그의 말에 약간의 주눅이 들어, 그녀는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등받이 의자에 슬며시 걸터 앉았다.
‘자 이제 시작 해 볼까요.’
덩치의 말에 손님 중의 한 사람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덩치가 내어 주는 의자에 앉는다. 티셔츠를 훌쩍 벗어 버린 백인 손님은 엷은 갈색의 털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창가로 비춰지는 오후의 햇살에 부딪쳐서 하얀색의 솜털로 되었다가 그림자에 따라 다시 갈색으로 변했다를 반복 했다.
그녀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눈길을 둘만한 곳을 찾기가 여의치 않았다.
진화되지 못한 인간에게 수술을 집도 하는 의사처럼 덩치는 자뭇 심각한 얼굴로 흰 고무 장갑을 끼면서 손님이 요구하는 거미줄의 독거미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한 손으로 샴푸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통 처럼 생긴 흰 용기를 거꾸로 잡고는 흔들어 대었다.
흰색의 크림이 플라스틱 용기에서 빠져 나와 손님의 어깨에 골고루 발라졌다.
독거미 그림의 원본을 복사기로 복사를 한 뒤 그림만 가위로 잘라 내고 투명 비닐 같은 것으로 덮어서 입을 넙적하게 벌리고 있는 코팅 기계처럼 생긴 흡착테이프를 만드는 기계로 밀어 넣었다.
덩치가 종이 수건으로 손님의 어깨를 문지르니 솜털과 갈색이 한번에 씻겨져 나가며 손님의 어깨가 죽은 자의 피부처럼 하얗게 드러났다.
한 바퀴 들어 갔다가 나온, 입이 넓은 기계의 끝에서 매달려 공회전 하던 흡착테이프를 손님의 어깨에 올려 놓고는 덩치는 참았던 가쁜 숨을 내 쉬었다.
독거미와 거미줄 그림이 엷은 검은 색으로 본이 새겨진 손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며 바라보던 덩치는 흰 비닐 팩에 밀봉된 바늘을 끄집어 내었다. 테이블 위에 일렬로 세워진 담배갑 크기 만한 문신기계에 총알을 장전 하듯 바늘을 양쪽 구멍에 맞추어 끼워서는 나사를 조였다.
덩치는 갑자기 예술가처럼 고상한 표정이 되어 작은 안약통 크기의 용기에 담겨져 있는 여러 색의 물감 중에 검은 색을 골라 콘택트 렌즈 보관하는 통처럼 생긴 용기에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바늘이 검은 물감을 한 모금 먹고, 상대방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어금니를 하얗게 드러내 보이는 핏불견처럼, 바늘은 파르르한 전기음을 내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백을 쥐고 있는 손을 움켜 쥐었다.
검은 선을 따라가는 바늘은 피가 튀어도 몸부림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전에는.
흘러 내리는 피를 덩치는 종이 수건으로 닦아 내며 바늘이 다시 피를 부르는 것을 반복하고 바늘을 통해 피하조직에 스며드는 검은 물감은 독거미를 만들어 간다.
손님은 고통에 약간 얼굴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돌려 자기 몸에 슬금슬금 기어 다닐 독거미를 바라 볼 때면 사뭇 자랑스러운 듯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독거미의 몸체와 긴 다리 하나가 그려 질 때 쯤, 대형 포스터가 걸린 쪽 벽의 문을 열고 독거미의 다리 하나가 비집고 나오듯 검은 색 티셔츠 차림의 키 큰 남자가 나왔다.
아까 전화 하신 분이죠?. 라고 묻는 그는 무표정하게 그녀의 행색을 찬찬히 살피며 덩치에게 ‘내일 보자구’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는 문을 나선다.
음침한 곳에서 거리로 나오자마자 쏟아 지는 뜨겁고 눈이 아릴정도의 밝은 오후의 햇빛이 그녀의 움츠렸던 마음을 조금씩 편하게 만들었다.
2
한발 앞서 걷던 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어떤 물건을 사실 거죠? 라며 돌아 보았다. 저... 차하고 살림 도구도 보고 싶고...
그녀의 갸름한 얼굴에 볼록한 눈매가 아내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아랫배가 살살 아프면서 많은 얼음 덩어리가 목젖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가슴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것 같이 시작 되는 이 증상은 아내와 살던 LA를 떠나면 멈출 줄 알았는데 원하지 않아도 갑자기 나오는 딸꾹질처럼 가끔 찾아 오고 있었다.
다른 차는 다 팔리고 혼다 차만 남았어요. 물건들은 창고에 있으니까 차를 먼저 보여 드릴 께요. 고양이 밥 줄 시간이 되어서... 하고는 앞장 섰다.
가게에서 한 블럭 정도 떨어져 있는 H-1고속도로를 지나치는 차량들이 핸드폰처럼 작게 내려다 보이는, 내가 사는 고층 아파트까지 그녀는 한발 뒤쳐져서 잠자코 뒤를 따라왔다.
아파트 빌딩 옆에 붙은 4층으로 된 아파트 주차장의 입구 엘리베이터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몇 층으로 움직이는지 계기판만 바라보는 그녀를 흘끔 보다가 입구에 서 있는 몇 그루의 야자수 끝을 올려다 보았다.
밀폐된 공간에 일상이 잠시 멈추는 곳.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의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예? 아. 예.
수업시간에 졸고 있다가 선생님으로 부터 갑자기 질문을 받은 학생처럼 단어의 어감을 되새기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의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표정이 그녀를 얕잡아 보는 느낌을 주었는지
저 미국에서 오래 살았었어요.라는 밑도 끝도 없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옷 매무새를 고쳤다.
주차장 한 켠에 세워 놓은 암청 색의 혼다 차는 광고를 내기 며칠 전에 세차를 해 두었지만 엷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서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 온 학생이 타던 차인데 그런대로 성능은 괜찮은 편이에요. 일이 년 정도는 고장 없이 타고 다닐 수 있을 거예요. 한번 둘러 보세요. 라고 말 하고는 아파트에 잠시 올라 가서 고양이에게 밥 좀 주고 열쇠를 갖고 오겠다고 하였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 마자 꼬리를 깃발 세우 듯 치켜 들고는 ‘오-옹’하고 나타난다.
잠꾸러기 녀석 ‘레옹’이 나와 같이 지낸 것은 이제 4개월이 조금 지나 있었다.
문신가게에서 같이 일을 하는 스티브가 키우는 ‘러시안 블루’ 종류의 고양이 한 쌍이 새끼를 낳아 한 마리를 나에게 선사 하였는데, 처음에는 낯설고 정이 가지 않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나름대로 묘한 정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었다.
일을 방해 하지 않으면서도 무료함을 달래 주는 장난꾸러기 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맹수의 근성을 착하게 살려고 이를 악물며 참는 개구장이기도 했다.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냄새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 발로 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 목욕재개하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비녀를 꼿는 단아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주차장에 ‘레옹’을 안고 내려 갔을 때, 그녀는 양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머리를 자동차 차창에 바짝 대고는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은회색의 ‘레옹’을 보자, 그녀는 약간 놀라는 것 같더니 하루종일 혼자 두어서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는 내 말에 이내 미소를 지었다.
시운전을 해보라며 그녀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네자 낡은 열쇠 때문인지 그녀의 흰손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녀는 본네트를 열고 엔진과 라디에타, 그리고 연결된 호스들을 마치 자동차 정비공이 된 것 처럼 이리저리 들여다 보며 만져 보았다.
많은 세월을 지낸 그들은 기름때와 적당한 부식이 피부의 주름살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자동차에 대해서 뭘 알기나 할까’하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녀와 나와 고양이가 탄 96년도 혼다 어코드 자동차는 주차장을 빠져 나와 와이키키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카이무키 언덕 쪽으로 달렸다.
6월로 접어든 태양은 더욱 뜨겁게 섬 전체를 달구고 있었다.
에어컨의 찬 바람이 그녀에게 더 가도록 조정을 하는 동안 팔에 안긴 ‘레옹’이 앞발로 그녀의 오른쪽 손등을 몇 번 문질렀지만 그녀는 그리 싫지 않은지 미소를 지었다.
차를 일본 학생에게 구입할 때 조금 신경이 쓰였었지만, 오늘따라 달릴 때는 괜찮은데 정차를 하면 자동차의 몸체와 엔진이 엇박자로 만들어 내는 소음이 더욱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른 라디오를 켰다.
요즘 들어 라디오에 자주 나오는 ‘기억’ 이라는 노래 소리가 소음을 잠시 가로 막는다.
그녀는 꼭 당신처럼 생겼어요
심지어 웃는 모습도 당신과 똑같아요
그녀는 순수하게 보였지만 전 바보였던 거에요
그대여, 당신을 볼 때면 그녀가 생각나요
당신은 한 때 제가 알던 소녀를 생각나게 해요
당신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요
그녀가 제게 했던 그 모든 일들을 당신은 믿지 못할 거에요
이게 바로 제가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죠
그녀의 속 마음을 알게 될 때까지 그녀가 제 운명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저만 빼고 다른 모두와 바람을 피우고 있던 거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죠
오랬만에 여자와 같은 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내와 비슷한 체구의 그녀가 만드는 풋풋한 살내음 따위가 엷은 향기처럼 피어올라 얼른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 보았다.
거리를 달리는 고급차가 눈에 많이 띤다. 은백색의 똑같은 그 차를 보았다.
이젠 LA에서 있었던 일은 잊어 버릴만도 한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그 차를 끝까지 따라 간 것이 잘못이었다.
남자와 같은 차에 타고 있는 아내를 내가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아내는 봉제 공장으로 급히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천연덕스럽게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도와 주었는데... 사람 의심하는 버릇 또 발동했어요? 라고 힐난하며 나에게 면박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로 눈 앞에서, 남자의 승용차 옆 좌석에 타고 남자의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아내를 확인하고는 나는 시동이 걸려 있는 트럭의 시동키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다리가 떨려서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지도 못 하고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뜨거운 용암 같은 덩어리가 심장 박동을 멈추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리 속은 시리도록 차가워서 온 머리털이 쭈뼛거리며 얼어 붙는 것만 같았다.
맨 처음에는 그들은 내차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차 뒷 유리창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남자는 오른팔을 옆 의자에 올려 놓은 것인지 아니면 아내의 어깨를 만지는 것인지 떨어져 앉아 있는 두 의자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 듯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들의 뒷덜미가 서늘 하도록 나는 그 차의 뒷 덤퍼에 닿을 만큼 비수로 변한 내 차의 범퍼를 바짝바짝 갖다 대었다.
헐리우드를 지나 웨스턴으로 진입해서야 그들은 내차를 보았는지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도 무시하고 질주하는 그 차의 뒤를 이대로 받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받으면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겠지. 사거리에서 회전을 할 때 옆구리를 들이 받아야 황천길로 보내 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턴에서 올림픽을 만나서 멈칫 대더니 갑자기 좌회전을 하고 다시 끝없는 운행은 계속 되었다.
자바시장에 거의 다 가서 신호대기에 걸린 그 차의 뒷부분에 바짝 붙여서 정차를 했을 때, 두 의자를 연결하던 남자의 팔은 어느새 내려져 있었다.
정말 고장 없이 이 삼 년은 탈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제가 정비공장에 가서 점검을 한번 쫙 했거든요
그럼 이차를 사겠어요.
흥정을 하자고 들면 일 이 백 불은 깍아 주려고 마음 먹고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사겠다는 그녀를 흘끔 보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하얀 손 때문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옹’은 뒷 좌석에서 실눈을 뜨고 잠이 들었다.
주차장을 빠져 나올 때는 여기서 우회전, 이리 들어가야 해요, 지금 퇴근 시각이라 저리 가면 교통 체증에 걸리 거든요. 라고 주문을 하였지만 아파트로 돌아 오는 길은 그녀가 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엔진과 자동차 몸체가 내는 엇박자에 가끔씩 끼어 드는 설장구 가락처럼 들리는 새로운 소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런. 이거 다 된 밥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장구 소리가 북소리 처럼 점점 더 커지고 가끔씩 징소리도 들렸다.
차가 좀 이상 하지 않아요?
그녀가 다급하게 물어 본다.
지나가는 차량이 울려 대는 경적 소리에 쳐다보니 타이어가 펑크 났다는 제스쳐를 해 보였다.
길 가에 급히 차를 대고 내려보니 운전대 뒷 쪽의 펑크난 타이어로 계속 운행을 한 탓에 타이어 옆 부분 이 전부 찢어져서 거덜거렸다.
이걸 어쩌죠... 미안해요. 라디오 소리 땜에 못들었어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두 손바닥을 펴보이며 어깨를 풀썩 한 번 올렸다.
트렁크를 여니 이사를 나간 텅 빈 집처럼 아무 것도 없다.
답답한 일본 녀석. 공구는 다 어디다 박아 놓은 거야. 카펫 밑에 감추어진 밑 판을 튿어내니, 공구와 조그만 스패어 타이어가 발굴을 기다리던 유물처럼 놓여져 있다.
제가 뭐 도울 일은 없어요?
그녀의 말에 잠자코 보자기로 싸여져 있는 공구 세트를 펼쳤다.
타이어 림을 고정해주는 볼트가 녹이 슬어 잘 열리지가 않는다. 볼트에 복스를 걸어 차체를 잡고 발을 딛고 올라서서 힘을 주니 낡은 미닫이 문에서 나는 소음을 내며 볼트가 돌면서 복스대 끝이 땅에 닿는다.
단말마처럼 석양이 지기전의 태양이 더 강렬하고 뜨겁다. 땀이 비오듯 했다.
햇볕에 서 있지 말고 그늘로 들어 가 있으라는 말에도 그녀는 잠자코 옆에 서서 죄송해요...하며 어쩔 줄 모른다.
복스대 끝이 땅에 떨어 질 때 마다 볼트도 돌고 하늘도 한 바퀴씩 돌았다.
아내의 부정을 알고 난 후에 섹스를 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잠이 든 척했지만 한숨처럼 몰아쉬는 숨소리는 자기의 몸에 뱀처럼 기어드는 손길을 체념하듯 내버려 두고 있었다.
빈 속에 소주를 한 병이나 마신 탓에 속도 울렁거렸지만 트림하듯 올라오는 증오심 따위가 만들어 내는 손가락의 전율이 아내에게도 전해 지는지 가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내는 용서를 해 달라고 했었다.
결혼 하기 전에 일 하던 회사의 사장이었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울었다.
가슴을 만지며 젖꼭지를 살짝 건들 던 뱀은 아내의 목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 올랐다. 목을 살짝 감싸 쥐었다. 뱀처럼 둥글게 목을 감고 조여 버릴까.
허벅지에 목을 끼우고 힘을 주어 누르는 것처럼 말야.
가스실에서 죽어가던 유태인처럼 눈과 혀가 튀어 나오겠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장례식장에 열려 있는 관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라스트 씬을 보여 주겠지.
목을 감싸던 뱀은 다시 머리를 돌려 다른 쪽의 가슴으로 내려 왔다. 그래서 가슴을 두 개씩 달고 태어 났나. 살기서린 뱀은 두 번째 가슴에서 욕정을 느꼈다.
가슴이 바람에 창호지 떨듯이 움직이고 뱀은 배꼽으로 내려간다.
탯줄이 달리고, 세상에 나와 탯줄을 자르고, 과거를 잊지 말라고, 교만하지 말라고 흔적을 남겼는가. 뱀이 혀를 날름 거리며 배꼽을 핣으며 살짝 눌러 본다.
숨이 더욱 불규칙 해지는 아내는 몸을 비비 꼬았다.
흘린 침을 닦듯 뱀은 음모를 살짝 물어 뜯기도 하고 머리를 음모에 비벼 대었다.
그래. 용서해 줄께. 너의 밑에 물기가 고여 있지 않는다면.
깊은 산 속에서 뱀이 목욕했던 고여 있는 물을 마시고 죽은 사람의 원혼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를, 그런 물이 없다면.
그 물기를 타고 뱀이 긴 동굴로 깊이 깊이 들어가서 가슴을 통해 머리까지 올라갈지도 몰라. 그리고 너의 머리를 뚫고 뿔처럼 굳어져 버릴지도 몰라.
바지를 내리고 성이 난 뱀을 풀어서 동굴에 집어 넣는다.
쏟아지는 눈물과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하늘이 돌고 침대가 사람이 탄 놀이기구처럼 돌고 또 돌았다.
스패어 타이어로 교체하고 볼트를 조이는 내게 그녀는 땀을 닦으라며 내프킨을 내밀었다. 스패어 타이어도 오래된 탓인지 공기가 충분하지 않아 공기를 보충하던지 새 타이어를 갈아 끼워야 했다.
가까운 주유소나 타이어 가게로 곧 가야겠다며 운전대를 잡는 내게 그녀는 제가 타이어 값은 치룰께요라고 말하고는 옆 좌석에 앉는다.
이제 여자가 마음이 변해 차를 사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각이면 아파트에서 샤워를 끝내고 반바지 차림에 베란다로 들어오는 마노아 계곡의 시원한 바람을 받아가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을 시각이었다.
하기는 아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그녀를 보는 순간부터 오늘 일이 무언가 뒤틀려 버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도 하였었다.
뒷 좌석을 돌아 보던 그녀는
고양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잘 자네요. 고양이 이름이 뭐에요?하고 물었다.
국면을 적당히 전환해 보려는 그녀의 의도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옹녀
고양이 이름을 기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처한 표정에 입을 다물 그녀를 흘끔 쳐다 보았다.
잠시 정지된 화면처럼 침묵이 흐르다가 그녀가 갑자기 소리내어 웃으며 묻는다.
여자 고양이 라는 뜻이지요?
웃어야 하나. 아니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린지. 그녀가 정말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 소리는 목 젖에 구슬이 하나 걸려 있는 것처럼 발랄하고도 여운이 있는 웃음 소리였다.
지나치는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탄성을 지른다.
가로수가 하나도 같은 나무가 없어요. 모양과 피는 꽃의 색깔도 너무 이뻐요.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사람들처럼 말예요.
삼년 전에 LA를 떠나 하와이에 처음 왔을 때, 하와이는 참 이상한 곳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금방이라도 현기증에 쓰러질 것 같은 이글 거리는 태양을 피해 그늘 밑에만 들어 가면 멀리 태평양에서 부터 불어 오는 바람으로 가슴까지 서늘했다.
분재같이 오밀 조밀하게 생긴 언덕과 길로 연결된 바다도 개울처럼 작고 얕아 보이고 하늘을 찌르는 듯한 코올라우 산맥도 마루에 쳐 놓은 병풍처럼 손에 잡히는 듯 했다.
그렇게 느꼈던 것은 캘리포니아 대지의 넓디 넓은 땅 덩어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허한 가슴 때문 이었을까.
LA에 온지 서너 달 후 쯤이던가, 자바시장에서 일하던 아내를 픽업하고 집으로 돌아 오던 길이었다.
아내는 차창 너머 길 거리에 싸늘한 눈 빛을 던지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까지 일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아침에 아내를 일하는 곳에 내려주고 집에 와서 한국 신문을 뒤지거나 차를 몰고 한인타운 여기 저기를 쏘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아내의 일이 끝날 즈음 시각에 맞춰 자바시장으로 가곤 했었다.
낯선 곳에서는 많은 상상을 하게 된다.
아내의 침묵은 나에게, 서울의 조그만 아파트 전세돈만 해도 억이 넘는데 결혼을 해서 미국에서 살겠다고 온 사람이 수중에 목돈 한푼 없이, 더군다나 한국의 대기업에서 일을 하였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주변머리 없이 일거리 하나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다니는지 하는 말이었다.
만난지 일주일 만에 약혼을 하고 서로가 기다렸다는 듯 두 달 만에 아내가 다시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치뤘을 때, 티브이에서 한창인기 있는 드라마의 제목이 ‘우리가 정말 사랑 했을까’ 였다.
‘인테리어’회사에 며칠 있다가 취직을 했다.
말이 ‘인테리어’회사지 목수 일에서부터 페인트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일거리가 있다고 하루 전에 연락이 와야 새벽에 일을 하러 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 프렌차이즈 관련 업무를 할 때, 어깨 너머로 본 신규 업소의 인테리어 공사가 밑천이 되어 일을 시작 하였지만 나의 일은 재료를 공사장으로 나르는 일과 쓰레기 따위를 치우는 잡일 이었다.
매트로 때운 짚보드로 된 천장의 이음새를 페인트를 하기 위해 샌드 페퍼로 갈아 낼 때면 떨어지는 먼지와 하얀 입자가 코로 들어가 쉰 냄새가 나고 눈과 입과 코만 내 놓고 얼굴에 하얗게 석고 팩을 하는 여자같은 모습으로 뿌연 안개 속에 서 있는 낯선 내 모습을 보곤 하였다.
타이어 가게에 도착 했을 때는 진주만 쪽의 하늘이 보랏빛 노을로 덮여 있었다.
밀린 작업이 많아서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는 점원의 말에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도 되요.
그렇게 말하면 여자는 죄송해요 하고는 못이기는 척 그 자리를 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말에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운 토끼처럼 묘한 표정이 되었다.
차는 언제 가져 가죠?
그럼 저 차를 살거에요?.
차 윈도우를 빠끔히 열어 놓은 공간으로 고양이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그럼요. 제가 구입하기로 약속했고 타이어는 제가 실수를 한 것인걸요...
그녀가 주는 개인 수표를 받아서 얼듯 보니, 이름이 ‘안젤라 스탠포드’ 라고 되어 있었다.
미국에 살았었어요. 하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을 하면 남편 성을 따라가는 미국의 관습에 따라 그녀도 스탠포드라는 성을 갖게 되었고 이혼 하고 한국에 가서 쉬다가 하와이로 왔겠지 하고 상상을 하였다.
백수 건달하고 결혼을 했었나. 젊은 나이에 이혼한 여자가 궁색맞게 중고차에 다가 중고 살림 도구를 찾는 것이 안스럽게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얼마나 못된 놈을 만나서 살다가 헤어졌으면 저렇게 생기가 철철 넘치고 눈망울에는 행복이 가득 담겨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길 건너편으로 ‘서울 바베큐 식당’ 한글 간판이 보인다.
식당 주차장으로 관광 버스 한대가 들어와 멈추고 수십 명의 한인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차에서 내려 놓았다.
몇 몇 남자들은 참았던 담배를 꺼내 물고 삼삼오오 둘러선 사람들은 얘기를 하며 크게 웃기도 하다가 안내자를 따라 줄지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한국 사람이 꽤 많이 오나 봐요. 라고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끔 국제전화 통화를 하는 친구가 전해 주는 한국의 친구들 소식을 떠올렸다.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부아도 나는 일이었다.
성근이 놈 말야. 자기 형제들하고 그린벨트 지역에 묻어 두었던 땅이 이번에 풀리는 바람에 돈 벼락 맞았다.
경호 그 녀석 말야. 마누라 하나는 잘 만났어. 미스코리아 뺨 치는 데다가 처갓집이 용인의 땅 부자 집이래. 그 자식 거. 원래 물건 하나는 죽였잖아.
너 김달수 알지. 아, 왜 거 꽁지 머리하고 다니던 녀석 말야. 너, 걔가 대학 교수 된거 아냐?. 죽이지?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 해요?
예. 일 때문에 좀 미뤄 놓고 있다가 이번 학기에 등록 했어요.
아. 전공이 뭔데요?
대학에서는 아트를 전공 했는데 지금은 인류학을...
그럼, 대학원?
예.
그녀를 다시 흘끔 보았다. 그녀의 흰 운동화가 어쩐지 이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여자라고 말 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오래 살았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두살 때 혼자서 왔어요. 그러니까 20년도 훨씬 넘게 살았죠. 말하고는 웃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 라고 이해하고 나자 ‘안젤라 스탠포드’라는 이름에 얽힌 상상에 대한 미안함도 겹쳐져서 문득 그녀에게 엷은 죄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난.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더 쑥스러워 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말을 너무 잘 하는데요.
혼자서 공부를 꽤 많이 했어요. 대학도 일부러 동양 사람들이 많은 캘리포니아로 갔고 친구도 한국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한국책도 많이 보구요.
한국말을 배우기 어렵다고들 하던데...
글쎄요. 한국사람이 한국말 배우는데요 뭐. 저 같은 경우는 뭐랄까.
오히려 잊혀졌던 수학 공식이 생각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본인이 노력을 많이 했겠죠
그래요. 어쩌면 나의 젊음은 한국을 가기위해 발버둥 치면서 준비 했었던 시간이었는지도 몰라요.
아내가 다니던 자바 시장의 일을 그만 두고 조그만 봉제 공장을 인수 했을 때, 아내는 인테리어 회사를 그만두고 봉제공장 일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자바시장 사람들과 1년 반동안 해 온 곗돈 2만 불과 아는 사람에게 융통한 돈 3만 불을 합해서 인수한 봉제 공장은 한인 부부가 운영하던 블라우스를 만드는 공장으로 멕시칸 종업원도 열다섯 명이나 되었다.
공장을 판 한인 부부는 남편이 갑자기 암으로 쓰러져서 간호를 해야 하는 부인이 혼자 운영할 수가 없어 급하게 나온 매물이었다.
어느 날 아내를 따라 블라우스 샘플을 가지고 간 곳은 켈리포니아에 있는 백화점에 수 십 개의 매장을 갖고 있는 여성복 판매 회사였다.
시간 약속을 한 바이어를 기다리며 옷 매무새를 고치는 내게 아내는 내가 전부 얘기 할테니까 당신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영어가 서툴러서 얕잡아 볼 수도 있으니까 라고 다짐을 했다.
미국인과 영어로 비지니스 상담을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사장인 아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무시하듯 말하는 아내에게 야속한 생각이 은근히 들었다.
이태리 출신의 바이어와 유창한 영어로 웃으며 얘기하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아는 사람에게 융통하였다는 삼만불의 돈을 혹시 그 남자가 빌려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는 매년 회사에서 벌이는 ‘영어 회화’ 테스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해 왔는데 미국에 와서는 입이 더 안 떨어지고 귀에 물 들어간 것 처럼 영어만 들으면 클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노래는 생각나는데 가수 이름이 생각 나지 않아 입에 맴도는 것처럼 매일 쓰는 한국말도 가끔씩 적절한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말하는 도중에도 말문이 막히는 것이었다.
차가 다 되었는지 알아 보고 오겠다며 그녀가 일어섰다.
타이어 가게 앞 대로변의 건널목 신호가 바뀌는 바람에 차량들이 멈춰섰다.
대형 성조기를 차에 매달고 달리던 트럭이 멈춰진 차량 뒤 쪽으로 다가와 섰다.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하고 난 후 부쩍 많아진 그런 모습을 한 차량들의 운전자는 거의 모두가 백인이었다.
운전하던 선글라스를 낀 턱수염을 기른 백인이 뻣뻣이 고개를 돌려 타이어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 보았다.
턱수염의 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눈은 ‘여기는 내 나라야. 너희들 나라가 아니라니까’ 하는 건방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스티브가 한말이 생각났다.
미개국의 키 작고 까무잡잡한 인종을 보게 되면 너도 그들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생길거야.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볼 때 그런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어.
그녀가 갑자기 소리질렀다.
어머, 어떻게. 고양이가 안 보여요.
그녀는 타이어 가게 작업장을 두리번 거리며 발을 굴렀다.
유리창 문을 조금 열어 놓은 공간으로 빠져 밖으로 나간 모양 이었다.
타이어가 쌓여져 있는 창고 안쪽으로 뛰어 갔다.
옹녀.
그녀가 거의 울상이 되어 정비공들에게 물어 본다. 나는 다시 정비 공장 뒷 쪽의 잔디밭 공원으로 뛰어갔다.
공원 구석 쪽을 한번에 둘러 보아도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레옹. 레옹...
잔디밭 가장 자리에 둘러진 키 낮은 나무 숲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야구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고양이의 행방을 물어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며 자기들의 게임에 다시 열중이다.
야자수가 몇 그루 서 있는 공원 가장자리의 벤치에 쇼핑 카트에 쓰레기 봉지와 때 묻은 옷을 가득 실은 노숙자가 앉아서 나를 보고 웃는다.
뭘 찾고 있는 거지? 머리를 감지 않아 기름기에 절어 마른 미역같이 변한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숙자가 묻는다.
원래 흑인계통의 인종 인지 아니면 씻지 않아서 인지 피부가 거무죽죽하다.
고양이를 찾고 있어요. 회색 고양이 인데 혹시 보았소?
그냥 그를 지나치려다가 대답 해 주었다.
물론. 많이 보았지. 이 공원에 사는 야생 고양이만 해도 몇 십마리는 될껄...이라고 대답하고는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벌어진 그의 입에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 있다.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 인데, 지금 방금 잃어 버렸어요.
내말에 노숙자는 어려운 시험 문제를 푸는 학생같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산에 들에 놔두면 이렇게 자기들끼리 잘 사는데 그걸 잡아다가 욕심부리고 혼자 키울려니까 도망을 가는 거지하고는 더 큰 소리로 웃어 제낀다.
돌아서는 나에게 노숙자는 한마디 더 붙인다.
고양이는 이제 안 돌아 올꺼야.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 갔거든.
나는 다시 타이어 가게 뒷 쪽으로 뛰어갔다.
멀리서 그녀가 고양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옹녀. 옹녀.
3
그가 타이어 가게 뒷 쪽의 잔디 공원 근방에서 고양이를 찾고 있는 동안 나는 고양이가 목이 말라 물이 있는 쪽으로 가지 않았나 싶어서 타이어 가게 근처의 물이 있을 만한 곳으로 찾으러 다녔다.
타이어를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것이야 내가 그 차를 구입함으로써 배상이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고양이를 잃어 버린 것은 타이어 가게에 오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기에 더욱 속상한 데다가, 돈으로도 변상을 하지 못할 일을 내가 만들었으니 정말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타이어 가게 옆에 붙어 있는 버거킹 햄버거 주방 뒷문 쪽에서부터 근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를 모아 놓는 컨테이너가 몇 개 있는 곳에서 옹녀 보다 두 배 쯤 덩치가 큰 때묻은 밤색 고양이를 발견 했다. 고양이는 웅크리고 앉아서 나를 쳐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총소리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나의 행동에 따라 금방이라도 달아날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너 회색 고양이 못 보았니? 너보다 덩치가 반 밖에 안되고 노란 눈을 가진 여자거든. 이름은 옹녀라고 하고. 못 보았어? 답답해서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를 찾으러 한국에 처음 갔을 때, 난 쉽게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엄마가 서울의 가톨릭 복지원에서 나를 입양 하였기 때문에 가톨릭 복지원에만 가면 나는 엄마와 바로 연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한국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가슴 아픈 기사 한 토막 때문이었다.
‘엄마와 나는 유리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멀겋게 눈만 뜨고 서로 바라 보았어요’
천신만고 끝에 엄마를 찾아 18년만에 만난 어느 입양아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자신과 엄마의 한을 그렇게 표현 했던 것이었다.
내가 엄마를 만나면 나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보내야만 했던 말 못할 사연을 나는 듣고 싶었다. 엄마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엄마의 눈을 보면서 하나도 빼먹지 않고 보고 싶었다. 엄마가 눈물을 흘린다면 나는 한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생각을 고등학교 때부터 해 왔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 하며 어떻게 살아 왔는지 또렷한 한국말로 또박또박 엄마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내 눈물을 훔치며 나를 안아 주는 상상을 몇 백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가톨릭 복지원’ 담당자의 얘기는, 버려진 나를 어떤 사람이 춘천 근방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발견하고 데려왔다는 얘기와 함께 나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다는 말만 들었다.
한 밤중에 아무도 살지 않는 로키산맥 근처의 울창한 산림 한쪽 낯선 땅에 하늘에서 떨어지듯 아니면 땅에서 솟은 듯 서 있는 내자신이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춘천 근방을 속절 없이 몇 주 동안 헤매면서 아무런 근거도 남기지 않고 나를 버린 엄마를 원망도 해 보았었다.
하지만 어차피 남의 손 아니면 외국 가정에서 커 갈 내 자신의 존재를, 맡겨진 곳에서 새로 태어 나기를 바래서 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바뀌어 지고 보니 엄마가, 엄마가 더욱 더 가슴 저리도록 보고 싶은 것이었다.
공원 뒷 쪽에서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걸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차에서 나간지 20분도 채 안 됐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풀 죽은 모습으로 말 하는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타이어 가게 앞 쪽으로 걸어 갔다.
하늘이 새벽 하늘처럼 파랗게 변했다.
이제 곧 어둠이 밀려 올 텐데. 그전에 돌아와 제발. 야생 고양이가 득실 거리는 거리로 나가버린 고양이는 덩치 들에게 얼굴을 찢기고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그들을 피해 그늘진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떨고 있겠지.
어릴 적 자란 본리시는 노스케롤라이나주의 수도인 라레이시에서 세시간이상 떨어진 대부분 백인들만 사는 작은 도시였다.
초등학교 신입생들 20여명 중에 흑인 아버지가 매일 데려오고 데려가는 흑인아이가 하나 있었고 검은 머리에 그들이 놀리는 ‘옐로우’는 오직 나 혼자 뿐 이었다. 검은 까마귀 무리 중에 섞인 흰 까마귀처럼 나의 행동은 그들에게 관심과 장난의 대상이 되었다.
수업 시간 중에 머리를 잡아 당기기도 하고 미술시간에는 코가 없는 문둥병 환자처럼 나를 그려 놓고는 자기들끼리 키득 대기도 하였다.
한 때는 우유를 먹으면 피부가 하얗게 바뀔 것이라는 상상으로 하루에 우유를 몇 컵씩 들이킨 적도 있었다.
사냥을 좋아 하던 양아버지는 가끔 총포점에 가기위해 한 시간이나 운전을 해서 샌포드시를 가곤 했는데, 어릴 적에 양아버지를 따라 간 그 곳에서 나처럼 머리가 검고 코는 뭉퉁한 키 작은 사람들을 만났다.
리커와 간단한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파는 델리샾이었는데 부부처럼 보이는 그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후에 나는 우유 마시는 일을 그만 두었다.
옹녀. 옹녀
어둠이 깃들어 진 작은 골목마다 소리를 질러 보았다.
어릴 적 나를 부르는 것처럼.
야생 고양이들에게 털을 물리고 문둥병 환자처럼 취급 받을 그가 안스러워 괜히 눈물이 나올려고 했다.
그가 언제 와 있었는지 말했다.
누가 집어 갔나 봐요.
반쯤 포기한 그의 말에 괜히 약이 오르고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뇨. 좀 더 찾아 보자구요. 타이어 가게 근방에서부터 다시 한번 만요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 뒷 쪽으로 급히 가려는 내게 그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저...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눈을 눈거풀이 반쯤 가리우고 고개는 나의 흰 운동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실은 고양이 이름이 ‘레옹’이거든요. ‘옹녀’라고 한 것은 제가 장난을 ...정말 미안해요.
엄마를 찾기위해 그 동안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는 어디에선가 나를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다른 이름을 부르고 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 졌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 고양이를 잃어 버린 속상함 보다도 오히려 내게 더 큰 미안함을 갖는 듯 했다.
4
그녀가 원하는 ‘레옹’의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 주었다.
그녀는 레옹을 찾는 포스터를 만들어 타이어 가게 인근에 포스터라도 붙여 보자는 얘기였다.
가계는 예약 손님도 없이 오전 내내 한가 했다. 스티브는 병원 예약이 있다며 점심시간이 지나서 일찍 퇴근을 하였다.
세시가 다 되어서 하와이언 계통의 여자와 자신을 해군이라고 소개 한 남자가 와서는 각자의 몸에 서로의 이름을 새겨 달라고 왔다.
남태평양의 강렬한 태양에 그을린 거무스르한 피부를 가진 통통한 여자는 남자의 팔에
‘신의 가호’라는 글자와 십자가를 그려 달라고 하고 키가 크고 마른 편인 남자는 여자의 가슴 부근에 자신과 여자의 이름을 새겨 달라고 하였다.
진주만에 정박한 항공모함의 수병인 남자는 하와이에서 휴가 기간 동안 그녀를 만났고 이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며 서로 변치 않을 사랑을 새기고 싶다는 묻지도 않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아내의 왼쪽 가슴에 입술로 빨아서 십자가를 만들기도 하고 배꼽 위에 다가는 별 모양을 만들기도 하였다.
행위 중에는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해 내버려 두던 아내는 나를 내려 놓고 나서야 그 곳을 들여다 보며 창피해서 사우나를 어떻게 가느냐고 역정을 내었다.
삼사일 정도 지나면 십자가는 거무죽죽하게 피부에 녹아들고 십자가가 겹치는 부분만 멍든 자욱처럼 푸르게 둥근 구멍으로 남았다.
그 남자가 혹시 아내를 다시 만나면 가슴에 새겨진 십자가를 보고 놀라 그것이 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 아내는 주술을 외는 나의 얼굴을 떠 올리고는 두려움에 떨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문신을 하는가.
생각해 보면 나는 아내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십자가를 남기고 싶었다.
그 십자가는 아내의 양심과 도덕을 지켜 주고 나에게는 위안과 평화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문신 이라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 것은 내가 남긴 십자가의 변화를 확인하기 보다는 혹시 그 남자로부터 남겨진 흔적을 찾는 일이 더 중요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내의 부정에 대한 씻어 지지 않는 감정은 때때로 그리고 일상에서 나를 찾아 괴롭혔다.
같이 타고 가는 퇴근길에 옆에 앉아 있는 아내의 치마 끝으로 나온 허벅지를 바라보며 그 남자도 이렇게 바라보며 음흉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고, 때로는 옷을 갈아 입는 아내의 모습에서도 그 남자 앞에서도 그랬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들로 머리가 뒤죽박죽 해지기 일쑤였다.
멀리 샌디에고까지 블라우스를 배달을 하고 돌아 올 때면 나를 이렇게 멀리 보내 놓고 아내는 지금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출근길의 아내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손님을 만나러 나간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전화통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고는 내 자신을 용서 할 수가 없어서 길을 가며 갑자기 소리를 __’c1嗤0 싶은 충동이 일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생면 부지의 남자 머리통을 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한 손으로 나머지 손을 꼭 잡고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난 어릴 적 살던 산동네를 떠올리곤 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가 보이는 끝 자락에 다닥거리며 붙어 있던 무허가 주택들과 좁은 길을 따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 개 짖는 소리, 담이 없던 집과 집 사이에서 들리는 싸우는 소리, 살림 부서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엄마가 아이 부르는 소리, 아이가 엄마에게 볼기짝을 맞고 우는 소리...
가끔 통화를 하는 친구는 한국에 다시 가서 살까. 라는 나의 말에 남들은 못 나가서 난리인데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지금 직장 있는 사람도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다. 네 자리는 없어. 그리고 너는 시집간 놈이 왜 자꾸 친정 신경을 쓰냐. 시집에 뼈를 묻어야지.
하기는 지금 내 나이로서는 반듯한 직장을 다시 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왠 만큼 자리를 잡고 사는 친구들의 언저리에서 자존심이 상하기 보다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 앞섰다.
남자는 여자의 겨드랑이 위쪽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점령지에 표시를 해 놓은 깃발처럼 마냥 뿌듯한 표정이 되어 바라 보았다.
항공모함을 타고 육 개월 만에 다시 돌아 왔을 때 또렷이 남아 있을 자신의 이름을 상상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띄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새겨진 십자가가 두 사람의 사랑과 거친 파도와 싸울 자신의 사랑이 안전하게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지켜 주리라 믿는 것 같았다.
내가 아내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은 십자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 거래처와 미팅이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집에 들어가라며 전화를 급히 끊던 아내의 전화를 받은 날 이었다.
지금 어디냐. 왜 혼자 만나느냐. 여러가지 묻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나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있었다.
12시 가까이가 다 되어서 집에 들어 온 아내는 새 거래처 직원들과 회식을 했다며 술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샤워를 적당히 끝 낸 아내는 피곤했던지 이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잠자는 아내가 입은 가운의 열려진 부분에 달리기를 금방 끝낸 선수 처럼 가슴이 헐덕 거리며 숨어 있었다.
아내의 가운 한쪽을 열고 내가 만든 십자가를 찾아 보았다.
일주일전에 만들어 놓은 십자가는 거무죽죽한 그림자만 남긴 채 두 선이 합쳐진 부분만 푸른 멍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십자가는 아내의 왼쪽 가슴에 또렷하게 침대 테이블 조명을 받아 광채를 내며 더 크게 남아 있었다.
나는 잠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가 아내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일 주일 전에 내가 입술에 너무 세게 힘을 주어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배꼽 위쪽으로 만들어 놓은 별은 거의 흔적이 없이 사라져 조그만 그림자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온 몸에 시리게 소름이 끼쳐 왔다.
언제 와 있었는지 그녀가 가게 안에 들어와 벽에 붙여진 문신 그림들을 돌아 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석고 팩을 하는 여자처럼 하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을 때는 비참함 보다는 그런대로 떳떳함 따위가 나를 지탱 했었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와서 나의 일하는 모습을 보는 그녀에게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심정이 되어 알수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뜨거운 스팀처럼 되어 얼굴로 올라 오고 있었다.
포스터를 만들었어요. 일 끝나면 같이 붙이러 다닐 시간이 있어요?
그녀가 내미는 포스터에는 ‘레옹’의 사진과 함께 ‘고양이를 찾아 주세요’ 라는 큰 글씨 밑에 잃어 버린 곳과 날짜, 그리고 연락처가 나와 있었다.
가게의 문을 닫고 나와서 그녀와 걷고 있는 길이 생전 처음 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들뜬 모습으로 보였다.
타이어 가게 근방에서 부터 사람들이 많이 지나치는 눈에 띄는 곳에 포스터를 붙여 나갔다.
이렇게 해서도 못 찾으면 할 수 없죠...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사진과 레옹이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분명히 누군가 보고 연락을 해줄 거에요.
포스터를 붙이는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한 군데로 모아주는 노란색 나비 핀이 테이프를 붙이는 그녀의 손을 따라 이리저리 날아 다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단지 춘천에서 나를 발견 했다는 것 한가지로 춘천 근방을 몇 주간 헤매고 다닐 때, 정말 안타까운 것은 엄마에 대해 한가지만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엄마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을 식당이나 공원 등지 에서 만나게 되면, 엄마는 저런 모양의 옷을 입고 다닐까. 저런 모습으로 웃을까.
머리는 파마를 했을까. 아니면 부적처럼 얼굴에 수심을 하나 가득 달고 다닐까. 그리고는 밤이면 여관에 돌아 와서 생각했죠. 어쩌면 엄마는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이스크림 밑에 감추어진 뜨거운 비엔나 커피처럼 가볍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눈동자는 잠시 흔들렸다.
한 때는 많이 미워도 했지만 내가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엄마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만약에 신이 있다면, 엄마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를 내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나보다 더 불행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코올라우 산맥이 물안개로 자신의 몸을 가리우고 물안개가 차츰 산 아래 쪽으로 내려와 여우비가 되어 얼굴을 간지럽혔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LA의 10번 고속도로에서 20중 추돌사고로 사람이 세 명이나 죽은 현장을 목격하고 집으로 돌아 오던 날, 단지 눈부신 햇빛 때문에 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처럼 나는 십자가 때문에 아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그렇게 떠나 온 것처럼, 어쩌면 이제 원한처럼 사람들의 피부를 파헤치던 일에서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우비가 바람을 따라서 다시 코올라우 산맥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여우비가 날아 가고 난 자리에 리키리키 하이웨이 쪽에 다리를 하나 걸치고 영롱한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그녀의 눈에 얼듯 무지개가 비추었다.
5
그녀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오늘도 연락이 없었나요?
그까짓 고양이 한 마리. 정은 들었지만 어떻 하겠어. 이제 고양이도 자기가 놓여진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며 살아 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이제 포기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만 나면 타이어 가게 근방을 찾아 다니는 그녀에게 그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타이어 가게 점원들도 그와 그녀의 얼굴을 익히고는 그들이 근방에 나타나면 아직도 못 찾았느냐고 걱정을 해주기도 하였다.
잔디 공원에서 야구 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그들을 만나면 공원의 건너편 숲을 향해
레옹. 레옹 이라고 같이 함성을 질러 주었다.
야자수 밑에 앉아 있던 마른 미역 머리카락을 가진 노숙자가 말했다.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뭘 그렇게 고생을 하고 다녀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녀가 물었다.
무슨 방법 인데요?
파티를 여는 거야. 그리고 여기에 사는 고양이들을 전부 초대 하는 거지
그는 싱겁게 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듣지 말고 갑시다 라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저 사람 말이 일리가 있어요.
지금 무슨 만화 같은 얘기를...
제 말은, 노숙자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하고 그들에게 부탁해 보자 는 거에요. 그들은 항상 밖에서 잠을 자니까 고양이가 어디에서 자는지도 알 거에요
세상에...이제 그만 둡시다. 난 이제 괜찮아요. 레옹은 돌아 오지 않아요. 더 이상 찾을 수도 없고
그는 눈망울에 한 웅큼 눈물이 고인 그녀를 바라 보면서 가슴 밑바닥의 실핏줄 같은 것들이 갑자기 요동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와 한인 수퍼마켓에 가서 갈비 30파운드와 야채 등 반찬 몇 가지를 구입하고 난 후, 신문을 뒤져서 세일을 하고 있는 마켓을 찾아가서 바베큐 용 석탄, 종이 접시 와 포크, 내프킨, 쓰레기 봉지, 음료수 등을 사서 차에 실었다. 이사 나간 집 같던 그녀의 차 트렁크가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공원 한쪽에 갈비를 구울 석탄 불을 피우고 그녀가 전기 밥솥에 세 번이나 준비한 밥과 음식을 공원 식탁에 늘어 놓고 있을 때, 마른 미역 노숙자가 부른 근방의 노숙자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큰 가방이나, 쇼핑 카트에 때 묻은 살림가지들을 싣고 때가 절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노숙자는 마약 중독자 같이 손을 떨기도 하고 충혈된 눈으로 바라 볼 때는 기분이 섬뜩해 지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밥과 반찬을 퍼 주고 그는 구운 갈비를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야릇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레옹의 사진이 나와 있는 포스터를 그들에게 한 장씩 나눠 주며 부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고양이를 찾지 못 하더라도 그리 헛된 일은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공원 끝 쪽의 키 작은 숲 사이로 야생 고양이 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고, 야구를 하던 열댓 명의 아이들도 자기들도 고양이를 찾는 일을 도와 주겠다며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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