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미국에 온 대표팀의 연습경기를 몇 차례 지켜보니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맛이 느껴진다. 남자경기 같은 호쾌함이나 통쾌한 슛은 찾아보기 힘들어도 나름대로 아기자기하면서도 창의적인 전술 플레이를 펼치는 게 관전의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그렇지만 여자축구 경기를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처녀 선수들이 공을 뻥뻥 내지르면서 부상의 위험을 마다 않은 채 머리를 날리고 상대 선수에 깊은 태클을 거는 모습들이 조금은 생경하기도 하다.
축구가 오랫동안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것으로 흔히들 알고 있지만 여자축구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여자축구가 남자축구 못지 않게 성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난 192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에 열린 여자축구 경기에는 1만여 명의 관중이 몰려 남자축구 못지 않은 인기와 열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축구가 변방에서 벗어나 주류 스포츠로 진입하게 된 계기는 지난 91년 12개 나라가 참가한 가운데 중국에서 제1회 여자월드컵이 열리면서부터 이다. 이를 계기로 여자축구는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특히 지난 99년 미국 월드컵이 거둔 상업적인 성공은 일반의 인식이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99년에 이어 4년만인 이번 주말 또 다시 미국에서 여자월드컵이 시작된다. 월드컵은 당초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괴질 공포로 개최지가 미국으로 급히 변경됐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16개국 가운데 한국과 북한 등 한반도에서 출전하는 팀이 둘이나 돼 한인들은 안방에서 편안하게 관전의 포만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월드컵에 처녀 출전하는 한국팀은 객관적 전력으로 볼 때 2회전 이상을 올라가기 힘들다. 앞으로의 가능성만 확인한다면 큰 수확이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로 중국과 미국, 독일, 노르웨이를 꼽고 있지만 북한을 빼놓고는 우승후보를 얘기할 수 없다. 예선에서 보여준 가공할 공격력과 수비력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미국 선수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그들은 세계 최고 팀 가운데 하나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북미간의 핵 문제로 인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열리는 이번 대회에서 공교롭게도 북한과 미국은 한 조에 속해 예선에서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만약 이 두 팀이 예선 1, 2위로 나란히 올라간다면 8강전, 4강전을 거쳐 카슨에 있는 홈디포 센터에서 열리는 결승에서 만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과 북한팀이 참가하고 북미 대결까지 벌어지는 이번 월드컵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순한 스포츠 제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남북을 구별조차 못하는 미국인들에게는 한반도 현실을 이해시키고 어린 2세들에게는 분단과 민족에 대해 산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부지역 한인단체들이 마음을 합해 남북한 응원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 북미관계를 고려해 볼 때 이번 월드컵은 외교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인 문제도 많은 경우 민간교류에서부터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핑퐁교류로 조성된 화해분위기를 바탕으로 미중 수교가 이뤄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얼마전 보수적인 정서의 대구사람들이 유니버시아드 참가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열렬히 환영한 것도 이런 염원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뉴욕타임스도 지적했듯이 북한은 많은 미국인들이 지켜 볼 미국과의 경기에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줌으로써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형성돼 있는 음습한 이미지를 벗겨낼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기회를 갖게 됐다. 호의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면 북 핵 협상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산 안 남기기’ 등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을 벌여 오고 있는 손봉호 교수는 얼마 전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 곳의 젊은이들이 삼성의 핸드폰이 유럽에서 인기라던데 사실이냐고 물으면서 자랑스럽다고 하더라는 얘기를 들려준다. 한국팀이 잘 싸워 결승에 올라 홈디포 센터에 온다면 당연히 태극기를 열심히 흔들면서, 만약 북한팀이 올라온다면 한반도기를 흔들며 힘차게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핸드폰 때문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에토스, 이런 것이 바로 민족의 동질성이니 말이다.
축구공 하나는 400그램에 불과하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다. 축구공 때문에 국가간에 전쟁도 일어나고 온 국민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축구공을 통해 남북이 다시 한번 하나 되고 북미간에 긴장이 완화되는 의미 있는 축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8일 오후 12시45분 오하이오 컬럼버스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북한간의 일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조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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