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비가 내렸다, 운전하던 내 옆자리에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면서 잠드신 것처럼
비오는 소리에 일찍 눈을 떴다. 오랜만에 흐린 하늘. 항상 봄날씨처럼 따뜻하고 투명한 햇살에 캘리포니아는 정말 축복 받은 땅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몇 해 전 추석 연휴 휴가로 친한 친구와 LA에 왔을 때 이 곳 날씨에 취해 무작정 드라이브를 즐기다 갔었고, 결혼 후 설에 시부모님께 인사 드리러 왔을 때도 두꺼운 털코트를 입고 온 게 민망할 정도로 이 곳은 해가 빛났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여행도, 인사의 목적도 아닌, 또 다른 생활 터전으로 삼아 남편과 나는 이 곳 LA로 이주해 왔다. 이 곳 날씨가 준 첫인상 때문이었을까. 이 곳의 생활은 내게, 무언지 모를 새로운 빛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제는 아버지도 곁에 없는, 눈시울이 붉어진 엄마의 얼굴을 외면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비 내리는 거리를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시작된 나의 상념들이 비오는 바닷가에까지 이르자, 출근하는 남편 뒤로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 이른 아침, 비오는 수영장엔 아무도 없었다. 비를 맞으며 수영하고 싶은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지, 하는 생각에 웃음도 나왔지만, 비와 수직으로 맞서 물에 내 몸을 눕히고 바라보는 흐린 하늘은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 안면도 바닷가까지 나를 이끌었다.
그 날도 비가 내렸었다. 떠날 땐 늦여름 호된 마지막 더위를 실감하도록 해가 우리 머리 위를 달구고 있었지만, 운전하고 있던 내 옆자리의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면서 잠드신 것처럼 보였을 때, 비가 조금씩 아주 조용히 흩뿌리고 있었다. 길이 막히기 전 먼저 떠나 조금이라도 고생이 덜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쉬는 토요일을 같이 맞춘 나와 남편은 서둘러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자신이 없으셨는지 그냥 너희들끼리 다녀와라, 하셨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는 평소 아껴 두셨던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쓰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티셔츠를 입으면 배가 불룩했었던 아버지의 허리는 어느 새 벨트를 잘 졸라매어 바지 허리춤을 겹쳐야 할 정도로 야위어져 있었다. 잠이 드신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신 것인지 차에 올라서도 계속 기침을 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새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계신 모습을 보면서, 난 엑셀레이터를 좀더 밟았다. 그렇게 잠시만 잠들어 있으세요, 빨리 갈게요, 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우리가 아버지와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를 오히려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마저 들어왔다.
누구보다도 당신 몸에 애착을 가지셨던 분, 매일같이 혈압을 체크하고 혈압약을 드시면서 아버지는 말했었다. 난 혈압 약간 높은 것만 빼고는 건강하대, 하면서 털털한 웃음을 웃으셨고, 오래 살자, 하며 엄마를 한 번씩 보셨다. 그런 아버지의 말씀에 엄마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오래 사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라고 중얼거리셨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를 무작정 믿었던 걸까. 2000년 12월 어느 날 퇴근 무렵, 큰언니에게서 난데없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난 아닐 거야, 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어버렸다. 목감기에 걸린 줄 알고 집 근처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해 준 약만 열흘 이상 드시던 아버지가 차도가 없자, 종합 병원에서 진찰하시고 암인 것 같다, 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오셨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정확한 검사도 안 해 보고 육안으로만 보고, 혼자 온 환자에게 거의 암이 확실하다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버릴 수 있냐며, 언니는 그 의사에게 화가 난 목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우리 가족에게 이제까지 큰 불행이 있었던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런 드라마에서나 보던 불행, 슬픔 따위가 우리에게 찾아올 리 없지, 속으로 곱씹어 말하면서, 나는 그날 밤 전화 건너편으로 들리던 언니의 음성을 잊으려 애썼다.
거리는 새해를 맞이하는 흥분된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썩였다. 지난 해 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텔레비전마다 거리마다 환호성의 목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은 듯한데, 이번에는 이제야말로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라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댔다. 뉴 밀레니엄 베이비가 태어나는 모습을 담으려고 유명한 산부인과마다 취재진들이 모여들더니만, 똑같이 2001년 베이비에 대한 기대로 카메라에 선 리포터들도 눈에 띄었다. 백 세가 넘게 살아오고 계신 어느 할머니의 역사적 새해맞이의 소감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어쨋든 이러한 호들갑스러운 새해맞이를 눈살 찌푸리며 바라보는 이들보다, 사람들은 모두들 의미심장한 새해가 밝아오고 있기를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직장이 명동이었던 나는 집이 출퇴근하기에 멀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서 자연스럽게 독립해 솔로의 자유를 즐기며 지내고 있었다. 12월 마지막 밤, 내가 살던 홍대 앞 거리 역시 2001년 첫새벽을 기다리며 카운트다운을 하려는 젊은이들로 레스토랑마다, 호프집마다 발디딜 틈 없이 만원이었다. 이제 2001년 1월 1일을 확인하고 동이 터오면 각자의 길로 돌아갈 그 발걸음의 허무함을 잠시 잊은 채, 난 몇몇 친한 친구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친구와 500cc 맥주잔을 높이 들고 목청껏 떠들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받았던 언니의 전화를 까맣게 잊으려 하면서. 아니, 검사 결과 암이 맞다며 울먹이던 언니의 말들을 애써 부정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있으면 다시 천만다행이라는 목소리로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연락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아무일도 없는 듯이, 떼지어 몰린 사람들 틈에서 나도 새해를 맞는 분주함에 한몫 끼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다들 그렇게 비슷한 해맞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새벽,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골목길 가로등 불빛으로 생겨난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난 무작정 쏟아지는 내 눈물을 원망하고 있었다. 내가 포기하는 것 같아서, 내가 지는 것 같아서, 이젠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무시무시한 어둠이 빠른 속도로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종교도 갖지 못한 나였지만, 우리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호통은 치지 말아주세요, 라는 주문 같은 기도를 마음 속으로 해대면서 인천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차를 몰았다. 암선고를 받고 혼자서 돌아오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바쁘게 사는 당신딸에게 성가실까봐 가까이 살아도 언니네 집에 일부러 들르지 않던 아버지이셨는데, 암이라는 말에 얼마나 앞이 캄캄했으면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집으로 못 가고 당신 딸을 찾아가셨을까. 아버지의 초라한 걸음걸이가 내 눈 앞에서 어른거리자, 가슴이 메어져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가, 언니들처럼 순탄하게 제때에 결혼하면 좋을 걸, 하고 바라보는 것만 같은 아버지의 눈초리가 싫어서 직장을 핑계로 집에서 나와 살던 나였다. 혼자 쓰던 침대와 옷장, 책상, 책들 몇 상자를 조그만 트럭으로 옮겨 놓고 대충 정리가 끝나자, 어쩔 수 없이 허락은 했지만 그다지 고급스럽지 못한 원룸을 다시 한 번 빙 둘러 보던 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갑시다, 혼자 살기 괜찮네, 하며 떠남을 재촉하시던 엄마와 함께 신발을 신으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며,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내 손에 쥐어졌는데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핑 돌았었다. 이렇게 난 혼자가 되는구나, 이제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스러운 외로움이 내 몸을 감쌌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솔로 생활은 내가 하는 일을 불평없이 즐기며 바쁜 나날을 살게 해 주었고, 또 주말이면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로 명동 거리를, 홍대 앞 거리를, 청담동 카페 골목을 쏘다니게 해 주었다. 말하자면 나는 어설픈 20대의 방황을 다 겪고 난 성숙해진 싱글인 것처럼, 나만의 자유와 일과 사랑을 맘껏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활들 속에서 난 어느 새 외로움을 잊었고, 인천에 계신 부모님들에게도 자주 찾아 가지 않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렇게 독립을 한 지 2년하고도 5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시끄럽게 맥주잔 부딪히며 한 해의 마지막을 깨어버리고, 안 좋은 기억도 다 잊고 싶었는데,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제는 사실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병명 앞으로 나는 불려 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만 알고 가족들을 소홀히 하고 그 동안을 살아온 대가인 걸까
아버지의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볼수가 없어…
목이 메어 그냥 면회실을 나오고 말았다
립시키고, 이제는 하시던 일도 정리하셔서 적적하셨을 텐데, 그렇게 두 분만 덩그라니 남겨 놓고 나의 삶에만 충실하려는 듯이 살던 이기적인 나의 모습을 원망하면서 차를 몰고 있던 내 눈에선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려왔다.
우리 가족의 새해는 서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요즘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이런 막연한 자위같은 말만 하면서 아무말 없으신 아버지의 등너머로 눈시울을 붉혔다. 담배를 끊으신 지 20년이 넘었건만, 왜 암세포가 아버지의 목에 붙어 있는 걸까. 골초들한테도 흔하지 않은 병명이라는데. 갑자기 내가 어릴 적부터 기침을 곧잘 하시면서 가래침을 자주 뱉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진 젊으실 적부터 목이 안 좋았던 가 보다, 하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이렇게 20여 년이 흐른 뒤에, 언니들과 난 그 사실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이제와서는 쓸데도 없는 회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수술을 하면 혀를 잘라야 한다는데, 그럼 말도 못한다는데, 하고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아버지를 안아 드리지도 못했다. 낫기만 하면 뭐든지 해야지, 그게 뭐가 중요해요, 라고 난 신경질적으로 남의 일 같은 말을 내뱉어 버렸다. 우리가 강해 보이는 게 아버지에게 좋을 거라고 나의 본능이 그렇게 날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암보험을 들어 놓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하는 큰형부가 미웠다. 보험회사에 다닌다면서 장인, 장모 보험 하나 들어 놓지 않은 큰형부의 그런 말들이 아버지 앞에서 민망스럽지도 않은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 나 역시 누굴 원망할 자격도 없는 딸이었다.
어떤 결론도 내리기에는 모두가 두려운 그런 현실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가장 빠른 대책을 간구한 건 오히려 아버지였다. 삶의 벼랑 끝까지 와 있는 환자에게 그저, 당신은 암말기이고 상당히 어렵습니다, 라고 마치 검사결과지에 적힌 것을 읽어 주는 기계처럼 비인간적인 담당 의사를 가족들 모두 무기력하게 비난만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모대학병원 학장으로 있는 친한 고등학교 동창을 찾으셨다. 국내에서는 목부위 암의 가장 권위 있는 의사가 마침 그 병원 소속 의사였고, 아버지는 그 분을 일단 빨리 만나볼 수 있도록 주선을 받았다.
말씀은 안하셔도 불안함과 나약해진 마음이 눈가에 뭍어 있는 아버지를 모시고, 휴가를 하루 받은 나와 큰언니는 그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서둘러 갔다. 빨간 신호등으로 차가 멈출 때마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차가 막히냐, 하시며 감출 수 없는 조바심을 드러내곤 하셨다. 그렇게 안산에 있는 병원까지 가는 동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자신의 건강을 자신만만해 하시던 아버지였는데, 이렇게 불쑥 찾아온 악마와의 싸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을까. 아니, 아버지는 악마의 존재를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차를 세우자, 아버지의 걸음은 언니와 나를 제치고 2층 교수실로 성급히 향하였다. 언니와 나는 이 분을 만나면 뭔가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안타까운 아버지의 걸음을 뒤따라야 했다. 수술 중인 의사선생님을 한 시간 정도 교수실에서 기다리면서, 국내 최고의 교수라고 하니까 일단 잘 온 거예요,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라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우리는 그나마 위안을 찾은 것처럼 조금은 편한 표정을 서로 주고 받았다.
드디어 교수님을 만나 뵙고 진찰실로 내려갔다. 내시경을 통해 아버지의 목 깊은 곳을 들여다 본 교수님은 암이 깊네요,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라는 말로 진단을 대신했다. 화면으로 본 아버지의 목 안은 누런 조직들이 덩어리를 이루어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슴은 떨려 오고 손에는 식은 땀이 흐르는데, 다행히 교수님은 혀를 자르지 않는 방법으로 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언니와 나는 서너번이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애써 아버지에게 웃음을 보였다. 교수님은 입원부터 서두르라고 말씀하셨고, 수술 날짜를 이틀 후로 잡아 주셨다.
이렇게 긴급하게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게 될지도 모른 채 병원에 온 우리는 몹시 당황스러웠고, 이제야 아버지가 얼마나 위급한 상태에 있는 것인지 몸서리치게 느껴져 왔다. 입원 수속을 하는 동안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불안한 얼굴을 차마 정면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아버지는 2인실 침대에 누우셨고, 언니는 입원실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러, 난 그 동안의 진찰 서류를 받으러 먼저 진찰 받은 병원에 가야 했다. 신문을 한 부 사다 드리고, 빨리 다녀올게요, 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아버지의 어깨는 더 처진 듯 했고,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난 곧 회사에 일 주일간의 휴가서를 던지고,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시는 엄마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가신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술실로 옮겨지는 침대에 누워 애써 불안함을 감추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가에 물기가 자꾸 어른거렸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사 선생님만을 믿으면서, 아버지가 살 수 있다면 뭐든 다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 하나로 대기실에 앉아 떨리는 엄마 손을 잡고만 있었다. 수술이 끝난 환자 이름을 보여 주는 전광판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한 건 다섯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얼마나 큰 수술이길래 이렇게 못 끝나냐고 안절부절 못하시는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던 와중에, 우리는 아버지 이름을 보고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달려갔다. 손에 뭔가 들고 나온 의사선생님은 이게 암덩어리입니다, 라며 우리에게 주먹만한 뻘건 핏덩이를 보여 주었다. 저게 아버지 목을 그토록 성가시게 하던, 아니 아버지의 목숨까지 앗아가려는 암덩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암이 깊더라고, 열심히 치료 받아야 한다고, 그리고 이젠 주님께 많이 의지하고 기도하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가버리는 의사선생님 뒤통수를 향해 난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수술이 어디있냐고, 수술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의사가 못하는 것은 하늘에 맡기라고 말하냐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아버지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셨다.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져왔다. 별로 애교도 없는 딸들 셋에게 아버지는 항상 조용한 분이셨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사시는지,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단지 아버지는 당신 딸들이 뭐든 최고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공부도 최고고, 사회 생활도 최고고, 항상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은근히 자랑하시며 사는 분이셨다. 한 시간 후 다시 면회를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눈을 뜨셨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마는 많이 아프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수술의 고통이 막 몸 속으로 느껴져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수술 잘 됐대요, 라고 말하고는 목이 메어 그냥 면회실을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자꾸만 말하면 일이 잘 풀려갈 것 같았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수술이 잘 되었다고 알리고, 나 자신에게도 자꾸만 말했다. 이제 다 잘 될 거라고. 퇴원하면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입원실로 옮겨진 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목으로 꽂아 놓은 호스를 통해 음료로 된 식사를 하셔야 했다. 가족들이 다들 모인 병실에 누워 아버지는 우리를 다시 보게 된 안도감 따위를 찾으신 것 같았다. 수술실에 들어가시면서 가족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던 걸까. 딸들, 사위들, 손주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쳐다보셨다. 나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는지, 아니면 아버지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면 안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버지는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자꾸만 손짓을 하셨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당신이 우리에게 성가신 존재가 될까 조심하시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 곁을 떠나고부터인 것 같다. 결혼한 언니네 집에 가셔도 엄마에게 자꾸만 집에 빨리 가자고 재촉하셨고, 가더라고 식사 시간을 피해 가시려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엄마는 남의 집에 왔냐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곤 했다. 언니나 나나 그런 아버지의 지나치게 깔끔한 성격을 항상 아쉬워 했었다. 그냥 다른 아버지들처럼 딸들과 농담도 하고, 부탁도 하고, 뭔가 요구도 하는 그런 아버지여도 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큰 도움은 못 주어도, 생일날 꽃바구니를 보내 주고, 화분 하나 사서 집에 놓아 주고 가시는 말수 적지만 세련된 분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에게 그리 좋은 남편은 못 되었다. 말없이 자식들 생각해 주시는 만큼, 엄마를 마음껏 아껴 주시는 분은 아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표현에 약한 분이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겉으로 나타내 주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여자의 본능을 잘 따라주시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이는 엄마였지만, 어쩌다가 다정한 남편들 얘기라도 듣게 되면 부러움을 표현하는 엄마는 어린 애 같기도 했다. 아버진 원래 말없는 분이니까 그렇지, 엄만 아직도 아버지를 그렇게 몰라?, 하고 내가 반박을 하면, 그래도 연애 시절에 써 주던 편지하며 서울에서 충남 홍성까지 엄마를 만나러 수시로 찾아오던 순정파였던 아버지를 엄마는 기억 속에서 꺼내 자랑하시곤 하셨다.
생활은 현실이었으므로, 눈을 감고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병원에 두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언니들과 형부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병원문을 나섰다. 그렇게 애정을 쏟아주시던 자식들은 옆에 있어 드리지도 못하고, 정작 옆에서 평생을 당연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당신의 아내만이 아버지 곁에 있는 거예요, 라고 아버지에게 말하고 있는 나는 우리들이 무척이나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서로 아무말도 못하고 각자의 차를 나누어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밖에 보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된 나는 방문을 닫자, 두려움이 방 안 가득 밀려 드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힘든 순간들을 어떻게 내가 이겨낼 것인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로 서너달 전 회사 동료의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복도에서 담배만을 물고 있던 그에게 힘내요, 라고 말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제 내가 회사로 돌아가 그에게 우리 아버지도 암이래요, 라고 말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나에게 위로를 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의 고통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기 보다는, 어떤 위로라도 받으면서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은 비겁한 욕구가 날 밀쳐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직장 때문에 평일에 안산까지 아버지를 뵈러 가기 힘든 언니들이나 나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차도를 물을 뿐이니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갔다. 주말이 되어 나는 남자친구와 아버지에게 갔다. 몇 달 전 아버지가 암인줄 모르던 때 양가 상견례까지 했었지만, 자주 말다툼을 벌이는 우리를 못마땅히 여겨 엄마는 내가 그와 헤어졌으면 하는 눈치였었다. 엄마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스듬하게 베게에 기대어 앉으신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을 본 건 아마도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곧 펜을 찾으시고는 되도록 빨리 결혼할 것 이라고 종이에 쓰셨다. 수술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버지는 누워서 막내딸의 결혼을 걱정하셨구나, 하고 아버지의 염려를 깨닫자 가슴이 저려왔다. 남자친구도 눈시울이 붉어진 채 퇴원하시는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간신히 대답할 뿐이었다.
호수를 통해 음료만으로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조금씩 체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목부위를 청결히 하기 위해 석션까지 할라치면 멈추지 않는 기침에 우리의 가슴까지 철렁 내려 앉곤 했다. 원래 유난히 깔끔하셨던
젊은시절 아버지를 옭아맨 그 상실감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이릴수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식사용 호수를 수시로 닦아 오라고 하셨고, 병원에서 제시하는 음료도 정확한 양으로, 정확한 시간에 드시려 하셨다.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며, 간호사인 작은언니는 신경이 예민해진 암환자의 증세라면서 맞추어 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병원 생활로 아버지 곁에서 24시간을 간호하시던 엄마도 지쳐 가시고 있을 무렵, 아버지는 생각보다 빨리 퇴원할 수 있었다. 수술한 지 한 달 정도 되어서였다. 우리는 마치 이제 이 병원에서 나가면 아버지의 암세포도 훌훌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주위 환자들의 인사를 받고 병원문을 나왔다.
아버지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강한 의지를 보여 주셨다. 이제 부드러운 음식부터 드실 수 있게 된 아버지는 옆에서 보기에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을 드시려고 했다. 한 달 동안 못 드신 것을 보충하시려는 것 같기도 했고, 살아야 한다는 의지에서 그러시는 것 같기도 했다. 안타까운 마음도 컸지만, 그런 아버지가 고마웠다. 식사도 잘 하시고 음성도 어느 정도 회복하시게 되자, 남자친구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자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마음으로 당신 딸의 미래를 걱정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던 우리는 아버지가 퇴원하신 지 한 달쯤 후로 날을 잡았다.
오랜만에 양복으로 차려 입으신 아버지는 목 아래쪽에 생긴 수술 자국이 자꾸만 신경 쓰이시는지 눈에 띄냐고 여러 번 물으셨다. 아버지를 옆에 모시고 식장을 걸어 들어가며 잡았던 아버지의 손에서 느껴진 그 온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당신의 책임을 끝까지 다하고 싶으셨던 거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좀더 천천히 아버지와 걸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환자 같지 않다고,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그 후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니시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치료도 받고, 기침과 싸우면서 약도 빼먹지 않고 드셨다. 아마도 아버지의 그런 강한 의지 덕분에 우리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일상을 흐트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말마다 뵙는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로 얼룩진 검은 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열심히 치료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셨다. 나는 치료 받으러 같이 가 드리지도 못하는 자식들의 무기력함에 고개 숙이면서, 얼마나 더 검게 방사선을 쪼여야 그 끈질긴 암세포가 죽어 없어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4월과 5월이 가고, 6월 초 엄마의 환갑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으신데, 엄마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며 잔치를 하자니 세상은 모순덩어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모와 외삼촌 몇 분만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기로 하고 보니, 아버지는 그 동안 참 외롭게 살아오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엄마와 결혼한 즈음 할아버지,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그 후 삼촌들과 고모들도 그 분들을 따라 하나 둘 서울을 떠나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난 어릴 적부터 친가 친척들의 얼굴은 잘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는 왜 할아버지를 따라나서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부모, 형제들을 모두 멀리 떠나보낸 채 홀로 가정을 이루고 살아오신 것이다.
엄마 환갑날, 식사를 하면서 내가 한 명씩 비디오 카메라를 대자, 각자 엄마에게 축하의 말과 아버지의 건강도 함께 비는 말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꼭 이런 시간을 준비라도 한 듯이 엄마에게 편지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 동안 마음 고생도 많았을 텐데 참고 살아 줘서 고맙다고,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잘하겠다고,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쓰는 문구처럼, 사랑하는 남편이 라고 카메라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저런 분이셨는데, 왜 그렇게 엄마는 그 동안 아버지 마음을 몰라 주었을까, 아니 우리는 왜 무뚝뚝한 아버지가 멋없다고만 생각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들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아직도 크게 소리내기 힘드신 아버지가 앉아서 박수만을 치시다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들어오셨을 때 나는 노래하시는 엄마 옆에 아버지를 세워 드리고 사진도 찍었다.
여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식사도 예전처럼 못하게 된 아버지는 자꾸만 야위어 가셨다. 좀 어때요?, 하고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힘없이 참을만 해, 라고만 대답하셨다. 음료로 된 식사 조차도 하시기 힘들게 되자, 간호사인 작은언니는 링거주사를 들고와 영양제를 놔 드렸다.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주사제를 보면서 이런 액체 몇방울이 몸 속에 들어가봤자, 어떻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줄지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차라리 아프다고 소리라도 지르시지, 아버지는 정말 참을만 하신 건가, 하는 어리석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말 없으시다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쓰러지셨다. 병원으로 모시려 하던 우리에게 아버지는 괜찮으시다며 손을 저으셨다. 시끄러운 병원에는 가기 싫다고, 그냥 집에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그토록 살기를 원하셨던 강한 의지는 대체 어디로 달아난 것인지, 이제 아버지가 희망을 버리신 것인지, 나는 아버지의 눈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의사선생님을 찾아간 나는 이제 힘없이 쓰러져가는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의사선생님은 아버지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일밖에 현재로서는 달리 할 일이 없다고 했다. 통증이 굉장히 클 거라고, 이제 한 두달 밖에 더 못 사실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답을 듣고 싶었는데, 다시 입원을 해야 한다면 입원을 하고, 다른 치료가 필요하다면 치료를 받겠다고 말하기 위해 의사를 찾아간 것인데, 병원에서는 할 일 다했다는 뜻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플 거라고 의사선생님은 말하는데, 그 동안 아프다는 말도 입밖에 내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인내심을 생각해 보니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났다.
가족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기도 싫었지만, 아버지를 가장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끝에, 경기도 부천에 있는 카톨릭 재단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앰뷸런스를 타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던 11월 초의 바람은 무척 차가웠다. 그 날도 우리 자식들은 회사일로 아버지와 함께 가지 못했다. 나는 겨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사무실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 하는 생각에 어젯밤 털모자라도 사서 갖다 드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생각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계셨다. 우리는 그 곳이 암환자들을 편안한 잠으로 인도해 주는 호스피스 병원이라고 차마 말을 못하고 아버지를 모셨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아시는 것 같다면서 눈물을 보이셨다. 수녀님의 기도를 받고,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일반 병동에서는 잘 쓰지 않는 모르핀을 맞고서 아버지는 이제 좀 괜찮네, 나 그냥 여기서 죽고 싶다, 라고 말씀하시더라면서 엄마는 흐느끼셨다.
매일 저녁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큰언니는 아버지를 보기만 하면 눈시울이 붉어진 채 복도로 나가 울고 들어오곤 했지만, 나는 참고 또 참았다. 그냥 평상시처럼 아버지를 대하고 싶었다. TV 뉴스를 나와 같이 보던 아버지가 손톱이 길다면서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하셨다.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 손톱을 깎아 드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손톱을 깎아드리며 아버지는 참 깔끔하시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 날 밤 언니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집에 갈 준비를 하려는데 갑자기 아버지는 덥다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셨다. 휠체어에 앉은 채 아버지의 머리에서는 식은 땀이 수건으로 닦기 바쁠 정도로 흘러내렸고, 숨이 막혀오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간호사를 다급히 불렀지만 간호사도 아버지의 등만 두들겨 줄 뿐이었다. 그런 상태가 3분 정도 계속 되고 나서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꽂고 간신히 누우셨다.
간호사는 엄마와 나를 불러 이제 가족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지금은 비록 의식이 또렷하시더라도 갑자기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코 앞에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을 간호사가 자꾸만 말해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주치의는 한 두달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온지 이제 3일째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나와 힘들게나마 TV를 보셨고, 아침은 잘 먹고 다니냐고 남편에게도 물으실 정도로 의식이 또렷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호흡 곤란이 몇 차례 더 있었고 그 주 토요일 오후, 일을 마치자 마자 가족들은 모두 병원으로 아버지를 뵈러 갔다. 손끝이 파랗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손을 확인한 작은언니는 복도로 나가 울기 시작했다. 간호사이기 때문에 암환자의 죽음을 몇 번이나 경험한 언니의 울음을 보면서 나는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딸들, 사위들, 그리고 손주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 것을 확인하고 편안한 미소를 머금던 아버지는 갑자기 병실의 불을 켜달라고 하셨다. 불이 환히 켜져 있는데 왜 그러세요?, 하고 묻자 이번에는 안경을 찾으셨다. 앞이 안 보이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간호사에게 달려갔다. 우리는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다른 방으로 옮겨야 했다. 방문에 붙여진 글자를 보니 그 방은 임종을 맞는 방이 었다.
찬송가가 흘러나오는 임종방에서 온 가족이 바라보는 가운데, 아버지는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지 6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힘든 호흡 곤란을 몇 번이나 참아내면서 가족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시고, 이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드셨다.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아버지의 가시는 길을 지켜볼 수 있게 해 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아직 준비가 안된 우리들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직은 아니라고 울부짖었지만, 아버지는 너무나 조용히 우리 곁을 그 방에서 떠나셨다. 우리 곁에 더 계시길 더없이 원했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만의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장례식을 치루면서 들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아버지처럼 깨끗하게, 조화가 많은 가운데 치루어졌다. 조문객들은 자식 농사를 잘 지어서 아버지가 꽃밭에서 가시는 거라고 우리를 위로하듯 말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장례식 일정으로 미국에 계신 아버지 형제분들 중에서는 한 분만이 급히 오셔서 장례식에 참석하셨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형님을 마주한 작은아버지는 많이 우셨다. 30여 년 동안 아버지는 부모, 형제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암선고를 받기 한 달 전쯤,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미국에 한 달 정도 머물면서 할아버지와 형제분들을 만나고 오셨었다. 엄마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버지가 혼자서 훌쩍이시더라는 말을 작은아버지에게 하셨다.
장례 절차가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첩을 펼치면서 아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오랜만에 펼쳐 보는 빛바랜 사진들이었다. 기계 체조로 근육을 뽐내던 학창 시절, 친구가 많고 외향적이었던 아버지의 성격, 그런데 대학 졸업 후 교통 사고를 당한 아버지는 수술이 잘못 되어 다리를 약간 절게 되자, 많이 절망하셨고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절망에 빠진 아버지는 엄마를 만나 많은 힘을 얻으셨고, 바로 결혼을 하신 모양이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다리를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부자연스럽게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모습은 그냥 나의 아버지의 모습일 뿐이었지만, 이제야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는 젊은 아버지를 옭아매 온, 자신감을 상실케 했던 아픈 상처였음을 깨달았다. 학교 앞에서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한 손에는 책 몇 권을 들고 사진을 찍은 아버지는 내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그런 엘리트였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느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우리는 사고로 인해 아버지의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버지의 그런 상실감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아버지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어리석은 아쉬움이 생겨났다.
아버지의 뜻대로 우리는 화장을 했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는 고운 한 줌의 재로 변한 아버지를 조그마한 단지 안에 모셔 두고, 용미리 추모의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갈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한다. 작은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많은 정신적 유산을 받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당신의 딸들이 각자 이 사회에서 한몫을 해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명석한 머리를 주셨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정직함을 가르쳐 주셨고, 삶에 어려움이 닥쳐도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는 이세상에서 남들에게, 또 가족에게조차 말하기 어려웠던 외로운 삶을 사셨는지 모르지만, 저세상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우리들을 바라봐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우리 가족은 더욱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을 배웠다. 나는 LA로 이주해 오면서 이제는 아버지를 가까이서 자주 찾아 뵙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한 번도 입 밖으로 표현하지 못한 한 마디를 아버지에게 지금 해 드리고 싶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선소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잔인한 4월이라고 했던가. 내게도 4월은 힘든 시간들이었다. LA로 이주해 온지 얼마 안되어 아기를 갖게 된 나는 낯선 환경에서 입덧으로 고생하던 중이었고 병중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자꾸만 눈물이 났던 나날들이었다.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가족을 떠나왔고, 그들을 그리워하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장 진실되게 전달 될 수 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의 하나됨과 사랑을 이제는 편안한 곳에서 느끼실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인내심과 용기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올가늘에 태어날 당신의 손주와 함께 이 글을 드리고 싶다.
이소연씨 약력
▲수년간 교원그룹, 웅진닷컴등 교육출판
계에서 교육용 컨텐츠 기획, 개발.
▲어린이 영어신문 더 키즈 헤랄드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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