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에서 코트까지
1. 잘못된 만남
내가 미국에서 첫 발을 디딘 곳은 마이애미였다. 이곳은 중남미의 서울이라고 할 정도로 중남미 출신의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에 남편이 몇달 먼저 와서 렌트 하우스를 계약해 두었다. 8월 중순에 우리 식구가 미국에 도착했는데 아이들의 학교가 8월 말에 시작된다.우선 집이 정해져야 아이들의 학교가 결정되는 것이고, 남은 두주일 안에 입학 수속을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남편의 사무실은 마이애미에 있었지만 집은 마이애미에서 차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웨스턴이라는 깨끗한 신도시였다. 집은 아담하고 깨끗했지만, 역시 남자의 안목으로 고른 집이라 실제로 그 안에서 생활해야 할, 한국 주부인 내가 보기에는 좀 불편한 구조였다. 그러나 정작 그 집에 대한 불편함이 거기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집을 렌트하면 우선, 집에 하자는 없는지 집안에 설치된 전자제품이 잘 작동하는지를 점검하는 워크스루라는 것을 한다. 미국 집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워크스루를 한다는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자제품의 작동법을 몰라서 고장이라고 체크하기도 했고, 점검해야 할 항목들을 많이 빠뜨리기도 했다. 워크스루 중에 가장 시급한 문제로 발견된 것이 세탁기였다. 세탁기가 돌아가기는 하는데 세탁과정이 끝나도 물이 세탁조 안에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이다. 우리측 리얼터가 집 주인측 리얼터에게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나는 계속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미국 집에서 손빨래를 한다는 것은 무척 불편했다. 한국식 집에서처럼 빨래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질 않다. 목욕실 바닥에도 하수구가 없기 때문에, 손빨래를 하려면 욕조에 들어앉아서 빨래를 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집주인에게 수 차례 전화를 한 끝에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땅딸한 키에, 풍선 만한 가슴은 삼분의 일 정도는 드러나 보이고 쫄바지로 가린 엉덩이는 성인만화에 나오는 그대로 하트모양이다. 저 키와 저 허리에 이런 가슴과 이런 엉덩이가 가능한가? 원래 남미 여자의 체형이 그렇다 쳐도 아무래도 실리콘이 많이 들어갔지 싶다. 안 그래도 큰 눈에는 시커먼 먹줄을 아래위로 그어서 한국 여자인 내가 보기에는 여염집 여자 같지가 않다. 자기는 집주인 글로리아 마르티네즈라고 하면서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턱에 힘을 딱주고 집으로 타닥타닥 들어온다. 구두소리가 따가닥따가닥 시끄럽다. 에콰도르 출신인 주인여자의 영어는 도저히 알아듣기가 힘들다. 영어를 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어째 똥 띠 까 또 꼬 뽀 같은 경음만 들려온다. 게다가 르으으하는 굴림소리로 모든 단어가 끝나는 것 같다.
나는 쌓여 있는 빨래를 보여주며 이머전시라고 강조한다. 글로리아는 이삼일 안에 고쳐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그동안 나는 집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 일주가 지나도 감감무소식, 다시 전화를 해댄다. 전화를 할 때마다 그녀는 내일 모레 내일 모레만 응답기처럼 반복한다. 더 이상 부드럽게 나가선 안되겠다는 감이 든다. 나도 막 나간다. 나 지금 베리 앵그리하다. 네가 당장 세탁기 고쳐주지 않으면 고소하고 이사간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집주인 글로리아가 드디어 실토를 한다. 엔지니어가 휴가를 갔는데 열흘 후에 돌아온단다. 아! 머리에 쥐 내리는데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열흘이면 확실히 되겠느냐니까 메이비 란다.
드디어 집주인 글로리아와 에두와도르라는 50대의 남미 엔지니어 한사람이 왔다. 그녀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마이애미 지역에 넘쳐나는 남미 노동자 중에서도 영어가 되지 않아서 인건비가 싼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그 사람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다. 이미 이사 온지 한 달이 훨씬 넘었을 때이다. 에두와도르라는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겨우 세탁기를 고쳤다. 에두와도르는 정식 기술자는 아니고 집안의 잔 고장을 손 봐 주는 핸디맨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들이 돌아간 후, 며칠 동안 쌓아두었던 빨래를 세탁기에 확 떨어 넣었다. 세탁기가 크렁크렁 돌아가는 소리에 그동안 쌓였던 체증이 사악 내려가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세탁기 아래쪽에서 물이 흘러 나와 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다. 웬일이야? 내가 세탁기 고쳐졌다고 너무 기쁜 탓에 앞뒤 못 가리고 빨래를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가? 가슴이 덜컥한다. 물의 양을 조절해 보니까 결국 로드 사이즈(load size)를 small이나 medium으로 맞추면 문제가 없는데 large로 맞추면 물이 흘러나온다.
다시 집주인과 에두와도르가 집에 왔다. 에두와도르가 세탁조를 꺼냈는데 이중으로 된 세탁조 사이에 노란 물체 하나가 끼어 있다. 당장 글로리아가 나를 보고 유 브로컨이라고 한마디한다. 너네 노란 양말이 저기 끼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사용상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니 네 책임이다 이런 말이다. No. 나도 자신 있다. 그 때 우리 집에는 노란 양말 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번 글로리아가 유 브로컨이란다. 내가 들으면서도 그녀의 영어는 뭔가 이상하다. 차라리 유 브러킷이라고 하면 문법에 맞을 텐데. 그녀는 영어의 수동형과 능동형에 따라 문장 구조와 동사형이 달라지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28년을 살았다는데. 나도 한번 더 하이 톤으로 No.라고 못박아 둔다. 결국 그 속에서 에두와도르가 꺼낸 것은 망가진 부속품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또 한 달이 지나서야 에두와도르는 부속품을 구해서 세탁기를 완전히 고쳤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고, 글로리아와 나의 지루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대체로 나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싸움이었다.
이사 온지 서너 달 지난 후에 싱크대 아래서 물이 샌다. 살펴본 바, 음식 찌꺼기를 갈아서 내려보내는 디스포절이 진동으로 들떠서 그 사이로 물이 새는 것이다. 에두와도르가 와서 방수제를 두차례 붙인다. 어느 날 한국 아줌마 셋이 모여서 김치를 담그는데 부엌이 물바다가 되었다. 디스포절 쪽으로 물이 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또 전화를 시작한다. 항상 오겠다고 약속을 한 뒤, 내가 하루종일 집에 붙잡혀 기다리고 있으면, 결국 글로리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날은 약속시간이 지난 뒤 30분 뒤에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글로리아가 전화를 받는다.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는데 왜 당신 집에 있느냐?
그래도 그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는다.
내가 오늘 피곤해서 집에 와서 쉰다.
그녀의 대답은 항상 그 모양이다. 원래 그런 경우에도 못 온다는 전화는 안 했지만 내가 전화를 하고 자기가 집에 있다는 걸 확인했으면 sorry라는 말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결국 에두와도로만 보내서 디스포절을 새로 갈아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또 그게 말썽이 되었다. 두어 달밖에 안된 디스포절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글로리아에게 그대로 보고를 할 수밖에.
그러는 와중에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간다. 어떡할까? 아이들은 학교를 옮기지 않겠다고 하는 데다 이사를 하자면 비용도 제법 들고, 제일 맘에 걸리는 것은 시큐리티 디파짓을 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글로리아 성격에 돈을 제대로 줄 것 같지가 않은데. 하지만 역시 결론은 주인이 좋아야 살기가 편하다는 것이고 남편과 나는 이사를 가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면, 이사를 나갈 때도 마지막 점검 때 걸리는 게 없도록 다 손을 봐야 한다. 제일 걸리는 게 잔디다. 잔디가 죽었다고 커뮤니티에서 주인에게 노티스를 보냈단다. 잔디 깎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땅속에 해충들이 많아서 잔디가 죽은 것이란다. 잔디를 새로 깔면 200달러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단다. 일단 약을 뿌리면 저절로 잔디는 복구는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으면 글로리아에게 책잡힐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마당에는 잔디 모종을 사서 십오센티 정도 간격으로 심어주고, 보도와 인도 사이의 화단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잔디 모판을 70여개 사서 덮었다. 그 잔디가 뿌리를 내리기까지 일주일 동안은 마음을 졸이며 하루에 세 번씩 물을 주었다. 이사를 나올 쯤에는 고맙게도 파랗게 잘 자라고 있었다.
플로리다의 집은 말 그대로 종잇장으로 되어 있다. 문손잡이가 부딪히는 벽면이 움푹 패여서 일단 신문지를 그 속으로 밀어 넣고 밖에는 석고를 발랐다. 못질을 한 곳에도 석고를 대충 밀어 넣었다. 블라인더 살이 하나 부러졌기에 홈디포에 가서 50달러를 주고 사서 새로 갈아넣었다. 무늬는 같지만 여닫는 방법은 다른 것인지라 그 점이 조금 맘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디스포절 문제를 매듭지어야겠다. 글로리아에게 고쳐 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못 고치겠단다.
왜 못 고쳐 주느냐?
돈이 많이 든다.
나는 렌트비도 냈고 내가 사는 동안 너는 고쳐줘야 할 의무가 있다.
너 이사 가니까 못 고쳐준다.
아, 그렇다. 이미 그녀는 우리가 이사갈 때까지 내야 할 렌트비도 다 받아 챙긴 뒤였다. 마지막 달 렌트비는 처음 계약을 할 때 시큐러티 디파짓과 함께 받는 법이다.
준비 완료, 이사가기 한 달 전에 집주인 글로리아에게 서티파이드 메일을 보냈다. 그 속에는 이사를 가겠다는 것과 디스포절에 대해서 통고했는데 집 주인인 당신이 점검을 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사를 가겠다는 말을 전화로 했지만, 나의 경우에는 글로리아의 성격상 뭘 걸고넘어질지 걱정스러워서 법적으로 증거가 될 수 있는 서티파이드 메일을 굳이 이용한 것이었다.
2.마지막 워크스루
8월15일이 계약 만료일인데, 8월14일 워크스루를 하기로 했다. 방학이라 남편과 나, 아이들 모두가 살던 집에 와서 20분쯤 기다리고 있자니, 글로리아 마르티네즈가 리얼터와 에콰도르에서 온 사촌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난다.
냉장고 문을 열더니 글로리아가 경악을 한다. 청소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길길이 뛰면서 냉장고가 더럽다고 난리다. 나도 알고 있네, 웬만큼 해두시지, 디파짓 안 주려고 맘먹고 하는 줄은 알겠는데 호들갑이 지나치다.
안방으로 간다. 안방 전등에 달린 팬이 돌지 않는다. 아이들이 침대에 올라가서 뛰다가 돌고 있는 팬에 닿을 것 같아서, 팬이 돌아가지 않도록 조정줄을 팬 위로 던져 놓았는데 그것이 팬에 감겨 있다. 글로리아의 유 브로컨 타령이 또 시작이다. 천장에 달린 팬에 키가 닿지 않아서 줄을 내릴 수가 없는데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다. 빈집이라 딛고 올라설 것이 없다. 더러워서 아이를 추켜 올리고 팬에 걸린 줄을 내렸다. 이 불쾌한 현장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화장실 캐비닛 아래쪽이 습기에 불어서 너덜너덜하다. 이게 하도 구석 쪽에 처박혀 있어서 이사한 후 넉 달만에 발견했다. 뭘 모르는 내가 글로리아가 렌트비를 받으러 왔을 때 이걸 보여 주었다. 그걸 자기측 리얼터에게 보여주며 또 유 브로컨이다.
내가 전에 너에게 이걸 보여 주지 않았느냐,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니다.
글로리아는 네가 언제 이걸 보여줬느냐, 내가 발견했다고 빡빡 우긴다. 우리 집 화장실에 지가 왜 들어와. 지가 우리 집에 있어봤자 내가 렌트비 체크를 꺼내줄 때 이삼분 뿐인데. 내가 너무 열 받아서 글로리아 너 거짓말쟁이하고 확 소리를 친다.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글로리아는 씩 웃음을 짓는다. 내가 발견했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고 말해도 글로리아와 리얼터는 믿지 않는다.
디스포절, 시원하게 잘 돈다. 고장이 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닐 조각 하나가 날 틈에 끼어 있었던 것인데 그걸 끄집어낸 뒤 문제가 없었다. 메일을 보내고 난 다음 조금 후회를 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글로리아는 나중에 우리에게 보내는 디파짓 사용 내역서에 수리비를 썼다고 기록했다.
한번 체면의 옷을 확실하게 벗어버린 후 글로리아는 더 자유로워졌다. 맘껏 억지도 부리고 우리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스페인어를 하는 저들끼리 웃고 찧고 까분다. 이제 무조건 유 브로컨이다. 거실에서 뒷마당으로 난 문 앞에 패티오가 있다. 잔디에 물을 줄 때마다 스프링클러가 돌면서 패티오 쪽으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비가 오면 패티오의 시멘트 바닥에 물이 든다. 그러면서 거기 이끼가 끼게 되었는데 우리 더러 프레스 청소비를 물어내란다. 수도꼭지 손잡이가 투명한 플래스틱이다. 그게 이중으로 붙어 있는데 분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 사이로 파랗게 곰팡이가 있다. 그것도 갈아야 한단다. 물론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결국 네 책임이다, 아니다. 소리치고 싸우면서 점검이 끝났다. 영어로 서로 싸우다가 작전타임이 필요하면 우리는 한국말로 그네들은 스페인말로 눈치 볼 것 없이 비웃고 욕하면서 대응을 한다. 주인측 리얼터는 화장실 캐비닛, 카펫의 얼룩, 뒷마당 패티오 이끼로 인한 프레스 물청소 이 세 항목을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사인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싸운 것 치고 그깟 것 아무 것도 아니네. 별로 돈 드는 항목이 없다. 이 정도면 많아야 400달러면 끝이다. 정신 없이 싸우는 통에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이다. 워크스루가 끝난 뒤 남편과 나는 조금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여보 글로리아의 태도로 볼 때 아마 돈 안 주려고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지?
그래도 설마 몇백달러는 남겨 주겠지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일주일 후 주인측 리얼터에게서 남편 회사로 메일이 왔다. 디파짓 사용 내역서였다.
페인팅-$950, 잔디 $680, 집청소 $120, 카펫청소 $90, 디스포절 $40, 수도꼭지 $15, 화장실 캐비닛(항목만 있고 지출금액은 없음)
메일을 보니 마지막 워크스루에서 사인했던 항목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지출 내역서가 작성되었다. 합계가 $1,850. 우리 렌트비가 한달 $1,650이니까 시큐리티 디파짓도 같이 $1,650이다.
내역서를 보니 일단 $1,650을 넘기기 위해 대충 꿰어 맞춘 것이다. 화장실 캐비닛 같은 경우는 항목만 있고 지출금액은 없다. 이미 $1,650이 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쓸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다. 디스포절 같은 경우는 워크스루 때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지출 금액이 40달러로 되어 있다. 워크스루 당시 작성된 서류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라는 증거다. 오랫동안 디스포절이 고장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출 내역서를 작성하면서 실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워크스루를 하면서 사인한 서류를 우리가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디파짓보다 200달러를 더 부른 것은 디파짓보다 200달러를 더 부르면 제발 더 이상은 안 내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할 줄 아는 모양이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면 담대해진다는 진리를 이 순간 깨친다.
일단 나도 좀 알아봐야겠다. 글로리아 마르티네즈 너 코리안을 우습게 보는구나. 내가 영어를 버벅거린다고, 내가 미국생활을 잘 모른다고. 듣는 게 안되고 말하는 게 안 돼서 그렇지 내가 한다하면 미국 법전을 뒤져서라도 한다 이거야.
우선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본다. 혹시나 하고 그 뒤편에 적혀 있는 플로리다 렌트 규정을 찬찬히 읽어본다. 뭔가 걸리는 게 없나? 하나 있다. 집주인 측은 시큐리티 디파짓을 임차인에게 돌려줄 때까지 금융기관에 보관해야 한다. 보통 디파짓은 리얼터 회사에서 보관하거나 주인이 보관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우리 디파짓은 집주인이 보관하는 걸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분명 글로리아는 돈을 받자마자 썼을 것이다.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할 돈으로 생각할 위인이 아니다.
우리는 반격을 시작했다. 글로리아에게 서티파이드 메일을 보냈다.
우리는 글로리아 당신이 요구한 것에 대해서 수긍할 수가 없다. 정말 우리 디파짓을 집을 보수하는데 사용했다면 영수증이나 반신 체크를 보게 해달라. 그리고 우리 디파짓을 금융기관에 보관했다는 증거도 보여달라.
이 두가지 조건이었다.
남편을 글로리아측 리얼터에게 전화를 해서 법적 액션을 취하겠노라고 통고를 했다. 그러자 리얼터는 자기는 글로리아가 시키는 대로했을 뿐, 더 이상은 그녀와 관계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즉시 살던 집에 가서 잔디밭 사진을 찍어두었다. 내가 심어두었던 그대로 잔디는 잘 자라고 있었다. 내 손으로 심은 것이라 나는 어디쯤 어떤 잔디 모종을 심었는지도 기억했다. 그런데 손도 대지 않는 잔디에 680달러를 요구하다니, 거짓말을 해도 최소한 논리적 뒷받침이 되도록 조금은 뭔가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사실 내가 이사 나오기 직전에 글로리아가 몰래 lawnman을 보내어 잔디를 보고 견적을 뽑게 했다. 나와 그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사람조차 견적이 300달러라고 했다.
잔디 사진을 찍으려고 그 주변에서 얼씬거리다가 나는 그 집에서 글로리아의 아들과 아버지가 페인트칠을 하고 나오는 듯한 모습을 목격했다. 아하, 페인트비는 많아야 한 20달러 들었겠구나. 손때 자국 위에 살짝 덧칠했겠지. 승산은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냥 밟히고 살수는 없지. 우리는 브라워드카운티의 법원에 소송장을 넣었다.
3. 첫 경험
10월에 소송장을 넣었고, 다음해 6월이 되기까지 두 차례 법정에서 통고를 받았는데 그 때마다 소송이 미루어지곤 했다. 아마도 글로리아가 소송 지연 작전을 펴는 모양이다. 드디어 6월이 되어서야 법정에 가게 되었다. 가기 전 전에 살던 집에 가서 잔디밭 사진을 다시 찍었다. 작년에 심어둔 잔디가 잘 자라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심은 것이란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작년에 찍은 사진과 올해 찍은 사진을 장소별로 분류해서 달력 종이에 붙였다. 내가 심은 것 외에 주인측에서 더 이상은 손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까지 간직해 두었던 서류와 사진을 챙겨서 가방에 넣고 인터넷에서 프린트한 브라워드카운티 지방법원 가는 길을 챙겨서 차를 탔다. 한국에서도 법원이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미국 와서 별일을 다 해보는구나.
오전 9시, 347호. 문 앞에 프리트라이얼 히어링 세트(Pretrial Hearing Set) 판사 캐더린 아일랜드라고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다. 변호사가 붙지 않은 스몰 클레임을 다루는 곳이고 우리가 판사 앞에서 직접 진술하고 증거를 보여주는 곳이다. 9시가 되자 먼저 조정자들이 오고, 판사가 들어온다. 우리 앞에 몇몇 피고와 원고가 조정자와 함께 방을 떠난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원고 우리, 피고 글로리아 마르티네즈의 이름을 부른다. 남편이 판사 앞으로 나간다. 그때까지 글로리아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다. 글로리아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조건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판사가 사건 개요를 간단하게 말한다. 아직 피고가 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손을 들어준다. 피고 글로리아 마르티네즈는 시큐리티 디파짓 1,650달러 모두를 피고에게 지불하라는 판결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기다니, 소송이란 것도 한번 해볼 만하구나. 하긴 글로리아가 무슨 할말이 있어서 법정에까지 나오겠어. 발걸음이 이렇게 가뿐할 수가 없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은 그 따위 서류들은 쓰레기통에 확 집어쳐 넣어버리란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맘이 굴뚝같은데, 혹시나 해서 클로짓 구석에 처넣어 놓는다. 돈 받을 때까지만 가지고 있어봐야지 싶다. 남의 나라 사정이라 모르는 게 많으니 조심스럽다.
그렇게 기쁨에 취해 있는데, 며칠 후 남편이 사무실에서 전화를 했다. 우리가 법정을 떠난 후 30분 뒤에 글로리아가 나타났단다. 그래서 판사는, 앞의 판결을 무효로 하고 글로리아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단다. 나 원 참 이게 미국법이라는 건가? 미국이란 나라에서도 법 하나는 대개 융통성 있게 쓰는구나 싶다. 그런데 내 서류들, 사진들 잘 있냐? 십년 감수할 뻔했다.
아무리 자신 있는 시험이라도 결과가 발표 나는 날까지는 스트레스가 가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원 가기 전까지도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도 행동으로 준비를 더 해보자 싶다. 전에 살던 집의 옆집에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게 인사는 나누고 살았다. 그 집에 갔다. 내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주인이 잔디에 대해서 680달러를 요구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마자 옆집 남자는 자기가 편지를 써주겠다고 했다. 내가 잔디를 깔 때 그가 보았다는 것과 이사를 할 때 잔디가 잘 자라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서명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남자의 이름이 존 구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웃하고는 역시 잘 지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상한 아시안이 아니라, 다정한 이웃으로 느껴지도록 해야겠다.
7월25일, 전에부터 준비한 사진과 존 구틸이 준 편지를 가지고 법정으로 갔다. 우리 앞에 대여섯 건의 소송인들이 불려서 판사 앞에 있다가 조정자와 함께 법정을 나간다. 우리 차례다. 판사가 조정자 한 사람에게 손짓을 한다. 체구가 조그만 할머니 한 사람이 우리를 데리고 조정실로 간다.
여기서도 사건 개요부터 다시 시작이다.
우리가 디파짓을 사용한 증거를 요구했지만, 피고는 보내주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우리에게 증거를 보내주었다고 주장한다.
조정자는 피고가 원고에게 보냈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한다. 글로리아는 자기측 리얼터가 우리에게 보내준 디파짓 사용 내역서를 보여준다. 조정자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호하다. 내가 의도한 것은 이게 아니다. 영수증이나 체크를 보여주세요.
그러자 글로리아가 영수증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잔디를 보수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잔디를 보수했다니,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도 참 선택을 잘못했다.
조정자가 그 영수증을 보더니, 글로리아에게 묻는다. 내역서에는 분명 680달러를 지불했다고 되어 있는데 왜 이건 600달러짜리 영수증이냐?
이쯤해서 나는 내가 준비한 잔디밭 사진과 존 구틸이 써준 편지를 조정자에게 보여준다.
조정자가 글로리아에게 돈을 돌려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차갑게 충고한다. 그랬더니 글로리아는 2000년 11월에 커뮤니티에서 잔디에 대해 보낸 노티스를 보여준다.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우리 같은 약자 앞에서는 강했지만, 법과 공권력 같은 강자 앞에서 너무나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저들이 이사하기 전에 잔디를 다 보수했다. 그러니 잔디 문제는 잊어라. 당신들 여기서 끝내지 않고 재판까지 가면 굉장히 어려워진다. 웬만하면 합의해라 조정자가 강경하게 말한다.
글로리아는 500달러를 주겠다고 한다. 그 여자 참 끝까지 우리를 우습게 보네.
500달러로는 절대 안 된다. 이건 자존심 문제다. 우리는 집 청소비, 카펫 청소비를 빼고 1,350달러를 요구한다. 글로리아는 500달러 이상은 안 된단다. 조정은 결렬이다. 재판까지 가보는 거다. 재판의 승소나 패소를 떠나서 나는 미국 사회를 경험하는 차원에서라도 기꺼이 가보기로 결심한다.
4. 결전의 날
8월30일, 드디어 재판날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봉투 째 넣어두었던 관련 서류를 꺼내본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이기더라도 얼마나 더 받게 될까?
글로리아는 실제로 디파짓의 어느 정도를 집을 보수하는데 사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돈을 내가 다 지불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건대 액수가 제일 큰 페인트의 경우 살짝 덧칠을 했을 가능성이 90%, 아니더라도 글로리아는 그 집에 5년을 살았고 나는 1년을 살았다. 논리적으로 나는 6분의1밖에 책임이 없다. 잔디 보수에 돈을 지불했다는 영수증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경험 많은 판사가 그 가짜 영수증에 속지 않을 것이다. 눈치로 보건대 글로리아는 다른 증거들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이때까지 가져오지 못했다면 사실은 돈을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정리되니까 자신이 생긴다. 오전 8시40분, 전의 347호 법정에 도착했다. 9시부터 10시까지가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이다. 법정에는 경비원 한 사람이 지키고 앉아 있다. 9시인데 글로리아가 나타나지 않는다. 9시10분쯤 경비원이 판사를 부르러 간다. 판사가 온 뒤에도 글로리아가 오지 않는다. 9시 25분, 피고 글로리아가 나타난다. 건장한 여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오는데 통역자란다. 남편과 내가 이미 원고석에 앉아 있는 터라 글로리아는 곧바로 피고석으로 걸어 들어간다. 의자에 앉아서는 다리를 꼬고 긴 파마머리를 좌우로 떤다. 판사의 존재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식이다.
이제야 말로 본 게임이다.
판사-피고 글로리아는 왜 원고에게 디파짓을 돌려주지 않았는가?
글로리아-원고가 나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다. 글로리아 너도 연구 좀 했구나. 사실 우리는 글로리아에게 새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 집을 알면 뭔가 해코지를 할 수 있으리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이 그거냐고.)
판사-원고는 피고에게 이사 가기 전이나 이사간 후에 공식적으로 주소를 알려 주었는가?
남편-우리 집 주소는 주지 않았지만 내 사무실 주소를 주었다. (남편은 9월 이후 글로리아에게 보낸 서티파이드 메일의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거기는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써넣는 난이 있다.하여간 시작부터 한방 먹은 기분이다.)
남편-우리는 돈을 합당하게 사용했으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글로리아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판사-피고는 증거를 보여주었는가?
글로리아-그렇다.
판사-그것을 내게 보여 주세요.(글로리아가 서류를 가지고 판사에게 준다. 판사가 서류를 본다. 조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글로리아는 리얼터가 우리에게 보낸 디파짓 사용 내역서를 판사에게 보여준다.)
판사-내가 말하는 것은 이게 아니다. 체크나 영수증을 보여 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영수증 한 뭉텅이를 판사에게 보여준다. 판사가 영수증과 디파짓 내역서를 번갈아 읽어본다.)
판사-그런데 영수증에 쓰여진 금액과 이 내역서에 명시된 금액이 왜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가?
(글로리아는 대답이 없다.)
원고측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내가 상황을 남편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남편은 항목별로 우리가 돈을 낼 수 없는 이유를 판사에게 설명한다.
남편-첫째, 페인트에 대한 900달러. 우리가 이사를 들 때도 그 집은 부분적으로 덧칠을 해놓은 상태였다. 900달러는 너무 과하다.
판사-피고, 글로리아 마르티네즈. 그 집에 방이 몇 개 있는가?(페인트비와 집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다.)
글로리아-침실 3개가 있다.
판사-당신은 그 집에서 얼마나 살았나? (오래 산 사람이 더 많은 부담을 진다.)
글로리아-(글로리아는 그 집에서 5년 살았지만, 대답 안 한다. 대신 판사의 다그치는 물음에 딴 청이다.) 내가 렌트를 줄 때 페인트칠을 해서 줬다.
남편-분명히 부분적인 덧칠이었다.
글로리아-내가 2년 전에 바깥벽까지 칠을 했다.(불리하면 동문서답)
판사-바깥벽은 임차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글로리아-아이들이 벽에다 연필자국을 남겼다.
판사-원고는 아이들이 있느냐? 몇 명이며 몇 살이냐?
남편-두 명이다. 7살 9살이다.
판사-연필자국을 남겼는가?
남편-그럴 것이다.(아니라고 하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이 정도는 정직성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남편-다음 680달러짜리 잔디 문제, 우리가 집을 나올 때 완전히 복구하고 나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진과 편지를 보여주었다. 글로리아는 다시 가짜 영수증과 커뮤니티에서 보낸 노티스를 보여 준다. 조정과정에서 했던 일이 되풀이된다. 판사도 조정자와 똑같은 말을 한다.)
판사-(내가 준 사진을 글로리아에게 보여준다. 사진에는 집의 앞부분과 앞마당 그리고 앞마당에 놓인 큰 화분 하나가 있다. 그 화분은 깨어졌기 때문에 주인이 버리고 간 것이다.)
이 사진 속의 집이 당신의 집이 맞는가?
글로리아-내가 우리 집에 갔을 때는 우리 집 마당에는 화분이 없었다. (자기 집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는 좀 뭐한 모양이다.)
남편-(남편은 디스포절에 대해서는 내가 보낸 서티파이드 메일을 보여주었고, 화장실 캐비닛에 대해서는 4개월 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집 청소비와 카펫 청소비 두항목이라고 생각한다.
판사-(양측의 주장을 다 듣고 난 판사가 결론을 내린다.)
나는 피고 글로리아 마르티네즈가 가지고 온 영수증을 신뢰할 수가 없다. 더구나 당신은 반신 체크도 가져오지 않았다. 피고는 카펫 청소비와 집 청소비 210달러를 제한 돈을 원고에게 지불하라.
원고 더 할말은 없는가?
남편-우리는 우리 디파짓을 금융기관에 맡겼다는 증거를 요구했지만 피고는 그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
판사-피고는 그 돈을 어디에 맡겼는가?
글로리아-워싱턴 뮤추얼이다.
판사-그렇다면 그 이자를 원고에게 지불하라.
(이 경우는 진실 시비가 중요한 건 아니다.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판사는 계산을 하더니, 1,650달러에 대한 연이자 9%, 그리고 우리가 쓴 자잘한 소송비용 115달러까지 합계 1.635달러를 피고가 원고에게 지불하라고 마지막 판결을 내린다. 글로리아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글로리아-내가 분명히 페인트칠을 했는데 왜 돈을 받지 못하는가?
판사-페인트를 칠하건 안 하건 그건 당신 마음에 달린 것이다.
글로리아-돈을 분할해서 지불해도 되는가?
판사-점점 짜증스러워 한다.) 나는 판사다. 당신이 돈을 지불하라고 판결할 뿐이다. 그런 문제는 당사자에게 의논해 봐라.판결내용은 한달 안에 양측에 우편으로 보내겠다.
야후, 속이 시원하다. 그 오만 방자한 글로리아가 판사에게 당하는 꼴이라니. 그러면서 한편 안됐기도 하다. 소송이라는 게 사람을 이다지도 악하게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싶다. 글로리아는 친구와 함께 뒤도 안 돌아보고 법정을 떠났다. 우리는 판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법정을 나섰다.
2001년 8월에 이사를 했고, 10월에 고소장을 제출, 2002년 8월30일에야 재판이 완전히 끝났다. 사실 그것은 재판이라 말하기조차 쑥스러운 조그만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소송을 준비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몰라서 상황 예측이 잘 안되고, 영어가 잘 되지 않아서 겪는 어려움이었다. 스트레스라면 정말 1,650달러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자세로 미국에 살아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다지 용감하거나 강한 사람은 아니다. 아시안, 그것도 코리안이라는 것, 영어에 능 통하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자주 받는다. 다만 그렇게 사는 것을 견디거나 방치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미국에 오래 사신 교민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미국에 살면서는 아무 일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러나 어떻게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약자라는 것 때문에 생기는 일도 많다. 이 사회에 산다면 항상 새로운 국면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피할 것인가? 나는 차라리 그럴 때마다 부딪쳐 보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근력이 붙을 것이다.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되지만 두번째 당할 때는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조금씩 미국을 정복하고 있구나 하는 자부심도 생긴다. 특히 아이들에게 당당해진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말해 줄 수 있다.
우리에게 이 일에 대해서 조언해 주고 격려해 주신 분이 있다. 그분에게도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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