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대 할머니가 40년간 가꾼
라구나 비치 ‘호텐스 밀러 가든’
모든 집에서 태평양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라구나 비치의 산동네 부촌 보트 캐년의 게이티드 커뮤니티 꼭대기에 자리잡은 ‘호텐스 밀러 가든(Hortense Miller Garden)’을 돌아보고 나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남기는 것도 이 세상에 헛되이 왔다가지 않았다는 증거의 하나라고 읊었던 유명한 영시 구절이 저절로 생각난다. 현재 90대 중반인 호텐스 밀러 할머니가 1959년에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와 30년 넘게 가꾼 1500여종의 갖가지 꽃나무들로 가득 찬 3에이커 가까운 정원은 라구나비치 시의 감독 아래 연중 대중에게 공개되고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후원회(프렌즈 오브 호텐스 밀러 가든)가 결성되어 있다. 그러나 주택가내에 자리잡은 사유지이기 때문에 2주전에 전화로 예약하고 매주 화~토요일에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둘러볼 수 있다.
약속한 날 인근 공원에 자기 차를 세워두고 도슨트와 함께 암호를 알아야 열 수 있는 게이트를 통과해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조그만 파란색을 칠한 나무문이 하나 나온다. 말하자면 뒷문인데 거기서부터 내려가며 펼쳐지는 이 정원은 제법 경사가 심해 지그재그로 난 산길처럼 스위치백이 많다. 당연히 편안한 신발을 신는 것이 안전하며 13세 미만 어린이나 휠체어 사용자는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다.
파란 문 앞에서 꽃구경에만 정신 팔리지 말고 발 밑을 항상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한 다음, 문 옆 담장에 피어있는 꽃부터 설명하는 안내인에 의하면 이 정원에는 보통 사람들도 잘 아는 세이지, 파피, 부겐빌리아를 비롯한 이 지역 자생종이 주를 이루지만 멕시코나 기후가 비슷한 지중해 및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는 희귀종들도 많다. 이름표를 붙여 놓은 나무들도 많이 눈에 띄지만 산골짝 오솔길 옆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식물들을 야생 그대로 자라게 둔 것이 이 정원의 특징이다. 이 정원의 바로 옆은 야산지대로 야생동물들이 많이 놀러와 이 정원에는 사슴, 라쿤, 다람쥐, 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물과 소금(암염)도 준비되어 있다. 호텐스 밀러는 비료도 살충제도 쓰지 않고 가끔 골분이나 조금씩 주어가며 식물들을 가꾸어 왔다니 취미 정도를 넘어선 진지한 정원사들이 둘러보면 더 유익할 것 같다.
문안으로 들어서서 한참 캘리포니아에 20년을 넘게 살았어도 모르고 지냈던 자생식물들을 처음으로 알아 보는등 이런 저런 나무의 이름과 종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내려가다 보면 언덕에 폭 파묻히듯 자리잡고 있는 야트막한 집이 나온다. 1950년대 클래식 모던 스타일로 지었고 뒤로는 산,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진 이 집에는 호텐스 밀러 할머니가 살고 있다.
몇 년 전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정원사를 고용하고, 워커에 의지해 걷는 것말고는 9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신이 맑은 이 밀러 할머니는 그리스, 라틴어도 잘하고 꽃과 나무는 물론 문학, 사회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하고 재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도슨트 마빈 존슨은 감탄했다. 미술교사로 은퇴한 자신에게 지금도 가끔 읽을 책을 추천해주는데 하나같이 깊이있는 내용이라는데 이 가든 웹사이트에 실린 밀러 할머니의 글을 읽으면 수긍이 간다.
미얀마 허니서클이 덩굴을 드리운 아래 3개의 버드 배스가 보이는 침실 앞을 지나 대나무를 이어 만든 쪽문을 열고 집안 마당과 현관을 통과해 다시 집 앞으로 내려가며 펼쳐진 정원으로 들어서면 자생식물 이외에 다양한 희귀한 외래종 식물들이 펼쳐진다.
이곳이 과거엔 바다였음을 알려주는, 퇴적층이 분명히 표시된 커다란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가운데 중국산 대나무도 있고 사막에서도 푸르다는 사막 소나무(잎을 씹어보면 짜다)도 있다. 일본 벚꽃도 있고 레드우드 나무도 한 그루 자라고 있으며 휘어져 눈앞을 가로막으며 아치모양을 이루고 있는 오래된 포인세티아 나무에서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빨간 꽃이 핀다.
내려가는 길 이곳 저곳에 나무 벤치들이 놓인 가운데 결코 꽃잎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스코틀랜드 사람의 지갑’, 희고 커다란 흰 꽃이 피는 ‘천사의 트럼펫’, 잎사귀 하나 없이 줄기만 땅에서 솟아 올라와 소담스러운 핑크색 꽃을 피우고 있는 아마릴리등 처음보는 꽃들 사이에서 소박하게 핀 나팔꽃을 보는 것도 의외의 즐거움이다. 스프링클러가 있지만 오래돼 보충하느라 물주는데만 3시간이 걸린다는 이 정원에서 한 줄기에서 꽃이 2층, 3층, 4층으로 피어있는 샐비아등 희한한 꽃들을 보며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면 부엌옆, 바다가 보이도록 벽돌길을 내고 그 사이로 또 작고 깔끔한 예쁜 정원을 만든 패티오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쓰고, 약간의 기부금(1인당 5달러 정도 기대한다)을 통에 넣고 뉴스레터도 읽으며 쉴 수 있고 식물이나 정원가꾸기에 관한 책을 구입할 수도 있다. 마침 백발의 밀러 할머니가 나와 있어 사진을 찍고 싶다니 “1백년전에 찍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그곳으로 정원 가꾸러 오라고 친절하게 초청도 하고 올해의 수리 계획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뒷문으로 나오기까지 투어에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정도. 처음엔 확 눈길이 가지 않아도 가능한한 자연 그대로라 언제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정원에도 사철 꽃이 피지만 가장 화려한 것은 4, 5월이다. 언젠가 야생화가 만발할 때 또 오고 싶은 정원을 떠나며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하는 정원을 남길 수 없다면 최소한 남들이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은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도리라는 생각을 했다. 투어예약 949-497-0716 ext. 6.
<김은희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