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트 태권브이’ 김청기 감독
기억하려고 애써도 잊혀지는 게 있는가 하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386세대들에게 ‘로보트 태권브이’는 후자쪽이 아닐까.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로 시작되는 주제가와 훈이 영희 똘이 등 등장인물은 물론 김청기란 이름 석자도 아직도 기억 한쪽에 또렷하다.
얼마 전 로보트태권브이 1탄 원본필름이 발견됐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다시 찾아온 김청기 감독(62)에게 당시 추억을 들어봤다.
▲ 피터팬과 이순신 장군=1960년대 중반까지 단행본 만화를 그리던 청년 김청기에게 디즈니 만화영화 ‘피터팬’과 ‘백설공주’는 충격이었다. 그 길로 8년여의 만화가 생활을 때려치우고 영화사 문을 두드렸다. 당시 스튜디오가 위치한 곳이 광화문 네거리. 긴 칼을 찬 이순신 장군 동상은 또다른 영감을 안겨줬다.
“흑백TV 시절인데 어린이들이 마징가가 일본 것인 줄도 모르고 좋아하는 게 너무 안타까왔어.” “이순신 장군을 보면서 빨리 우리 로보트 만화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지. 태권브이가 서 있는 폼이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본뜬 거 알아?”
▲ 태권브이 출생지는 여관방=컴퓨터라곤 없었던 1976년. 점 하나, 선 하나도 손으로 그리려면 많은 인원이 필요했지만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었다. 한 달간 여관방을 뒹굴면서 태권브이 시나리오를 완성한 김감독은 대한극장 옆 가정집을 빌려 제작에 착수했다.
인원은 단 30명에 주어진 시간은 불과 6개월. “집에는 아예 못들어가고 밤 새는 게 일쑤였지. 훈이와 영희,메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찌그러지는 부분이 있는데 졸면서 그리다 펜이 삐져나간 거야.”
상황은 열악했지만 열정만은 대단했다. 음향을 맡은 김벌레씨는 “태권브이가 고유 무술 태권도를 하니까 소리도 우리 것이어야 한다”며 아쟁과 징 소리를 섞어 음향을 만들어냈다.
작곡가 최창권씨는 주제가를 훗날 가수가 된 아들 최호섭군에게 맡겼고, 촬영기사 조복동씨는 촬영에 밤을 새우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나가기도 했다. 김감독 데뷔작이자 국내 첫 SF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 흥행의 추억, 그리고 속편들=일반 영화 제작비가 2,000만원 남짓이던 당시로는 획기적인 3,500만원을 들여 만든 태권브이 1탄은 1976년 7월24일 첫선을 보였다. “서울은 대한극장 한 곳에서 상영했는데 난리가 났지. 어린이들이 몰려들면서 줄이 성심병원(현 중대 필동병원)까지 늘어섰으니까.”
부랴부랴 세기극장(현 서울극장)을 상영관으로 추가하고 몰려든 아이들을 버스로 실어날랐다. 다음 스케쥴에 밀려 18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두 극장에만 28만명이 들었다. 당시로는 역대 한국 영화 2위 기록이었다.
곧 이어 만든 2탄, 3탄도 인기몰이를 했지만 김감독의 수중에 들어온 돈은 별로 없었다. “집까지 저당잡혀 만든 1탄이 대박이 터졌는데도 끝나고 나니까 빚이 남더라고. 그만큼 흥행을 몰랐다는 얘기지.” ‘똘이장군’(78년) ‘우뢰매’(86년) 등 꾸준히 인기작을 내던 김감독은 96년 부도를 내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로보트 태권브이’ 영화 속 장면들.
▲ 못다한 얘기들, 그리고 부활의 꿈=태권브이 2탄 때는 심의에서 3분50초 정도가 잘려나갔다. “훈이가 마사오와 절벽에서 대련하는 장면에서 마사오의 머?ザ薦?바람에 날리는데 장발이라고 잘린 거지. 3분50초를 만들려면 30명이 꼬박 1주일 밤샘을 해야 했는데 말야.”
지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큰아들 경종씨(32)는 그래도 아버지 덕에 편안한 군대생활을 했다. “별명이 태권브이였대. 고참들이 벌을 세우려다가도 태권브이 노래 부르면 봐줬다더군.”
이달 초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태권브이 1탄 필름은 극장 상영본이 아닌 원판 네가필름이다.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은 기분이었지. 극장본이 DVD로 복원됐지만 주룩주룩 비가 오고 보기에 참혹하거든.” 1탄을 디지털 기술로 복구하는 데는 10억원 정도가 소요될 전망.
김감독은 이와 별도로 태권브이 탄생 30주년인 2006년을 목표로 3D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 부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많은 분들이 태권브이를 사랑하고 김청기란 이름도 기억해주니 큰 돈은 못 벌었지만 행복하다”는 김감독은 “전래동화를 재해석해서 멋진 은퇴작품 하나 만드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스포츠투데이 이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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