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가, 변호사, 교사, 수모 씨름선수, 포르노 배우, 빌보드 모델, 도색잡지 발행인, TV 스타, 베니스 비치 보헤미안, 혹은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아줌 마… 10월7일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소환선거에 온갖 직종, 계층, 인종, 나이의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 우르르 후보로 나왔다.
캘리포니아 적자재정이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의 책임인지, 그렇다면 주지사를 소환해야 하는 건지, 소환선거를 하면 누구를 찍어야 하는 건지 통 관심이 없던 한인들도 요즘은 모이면 선거를 화제로 삼는다.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나오고, TV, 신문, 잡지들이 연일 서커스 중계하듯, 코미디 쇼 보도하듯 캘리포니아 선거를 다루고 있으니 관심을 갖지 않기도 힘든 분위기이다.
이번 선거는 거의 100년 전 주법 제정 후 처음 실시되는 소환 선거라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선 호기심이 가는 것은 135명 후보들의 출마 동기이다.
LA 타임스 인터넷 판의 선거 후보란을 보면 크루즈 부스타만테 부지사등 민주당 2명, 백만장자 빌 사이먼, 피터 유베로스 전 야구 커미셔너, 슈와제네거등 공화당 4명,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 칼럼니스트 아리아나 허핑턴등 모두 8명만을 후보 대접하고, 나머지는 ‘기타 후보들’로 처리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전혀 당선 가망이 없는 120여명의 ‘기타 후보들’은 무슨 마음으로 선거판에 뛰어든 것일까. ‘65명의 서명, 후보 등록비 3,500달러’면 누구나 출마할 수 있는 낮은 문턱이 물론 후보 난립의 기본 배경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안될 게 뻔한 일에 왜 그 수고와 돈을 들이는 걸까.
“명성 아닐까?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었다면 남들이 달리 봐줄테니까”“3,500달러 내고 정치 쇼에 한번 출연해보자는 심리”“투표용지에 이름이 오르니까 - 그걸 자손 대대로 물려주려고” 혹은 “돈 있고, 시간 있고, 머리 나빠서” 등이 주위 사람들의 농담 섞인 분석이다.
그런가 하면 정신과 의사들은 과장된 자만심, 혹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을 상당수 후보들의 심리적 토양으로 진단한다. 과대망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실제보다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곧잘 겁 없이 큰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 혹은 열등감도 남들 앞에 나서고 싶은 심리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캘리포니아에는 왜 이렇게 나서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까. 캘리포니아의 특징과 상관이 있다고 본다.
캘리포니아 하면 떠오르는 것은 골드러시, 할리웃, 이민자이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노다지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이나, 스타를 꿈꾸는 연예인 지망자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온 사람들 - 모두가 현실에 안주하는 유형이 아니다.‘하면 된다’의 자세가 강한 사람들이다. 전통이나 권위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기의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데 지나치리 만치 자신감이 강한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 주민은 그들의 후손들이다. “엉망으로 가는 캘리포니아 정치, 내가 나서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동키호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것은 캘리포니아의 역사 깊은 직접 민주주의 전통이다. 시민들이 언제든, 강력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풍토이다. 정치권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런 전통을 만들어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주지사 선거 출마 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한 말이 좋은 예이다. -“나를 정치가로 여기지 말고, 정치가들을 청소해낼 한 사람의 시민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캘리포니아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철도회사를 대표로 한 거대 기업들이 돈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정치적 부패가 심각했다.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는 길은 일반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하이럼 존슨 주지사가 주민소환, 주민발의 등의 체제를 도입한 것이 막강한 시민 정치력의 근원이 되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의회를 돈으로 매수하는 것보다 주민들을 매수하는 게 더 힘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100년후 135명 후보 난립의 판도라 상자로 나타날 줄은 존슨 주지사도 상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선거까지 7주 - 판도라 상자 안에서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져 나올지 불안하고 궁금하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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