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9.11 발생 후 테러를 응징해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분노가 미국을 온통 휩쓸면서 미국 언론은 미국인들의 애국심 고취에 열을 올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선 부시 대통령은 미국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영웅으로 부상했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라 대법원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으로 입지가 매우 취약했던 그가 단번에 지지율이 90%가 넘어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도를 받은 대통령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닉슨 대통령은 언론의 포화를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중 하차한 대통령이다. 닉슨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자존심이 강하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확신에 찬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론으로부터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 의혹에 대한 추궁을 견디다 못해 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후임 대통령의 사면으로 겨우 형사처벌을 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은 4강까지 올라가는 기적을 이룩했으나 외국인들의 찬탄을 받은 것은 4강 진출보다도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열렬하게 응원한 전국민의 축구 열기였다. 이 축구 열기는 언론매체들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 그리고 세계 구석구석까지 전해져 한국민의 저력을 새삼스럽게 과시했다.
이처럼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언론의 힘이 막강한 이유는 언론 자체에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론이 여론의 제도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론이 언론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되므로 언론이 모두 모이며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여론이란 제왕시절에는 민심이라고 했고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여 두려워하였다. 여론정치를 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여론을 표출하는 언론을 매우 중요시하며 언론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헌법에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에 대한 불만을 여러 번 토로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언론과의 전쟁을 주장할 만큼 반언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여러 번 드러냈다. 이번에는 측근인 청와대 부속실장의 향응사건을 언론이 집중 보도하자 언론에 굴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는 사설, 칼럼 등의 편파성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을 강구할 것이며 피해자의 신청이 없더라도 언론의 내용을 스크린하는 제도를 만들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언론 검열을 실시한다는 새로운 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언론과 권력은 상극관계일 수밖에 없다. 권력은 어느 누구의 견제도 받기를 원하지 않는 반면 언론은 권력의 횡포와 남용을 비판 견제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권력은 언론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독재권력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언론을 꺾으려고 하고 보다 민주적인 권력은 언론을 회유하거나 타협하려고 한다.
언론이라고 하여 초법적인 세력일 수는 없다. 언론사나 언론인이 실정법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정치인의 경우와 같다. 다만 권력의 힘으로 언론을 옥죄는 것은 결국 여론을 옥죄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짓밟는 행위일 뿐 아니라 민심, 즉 천심을 거슬리는 행위가 된다. 여론의 표출 수단인 언론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여론, 그 자체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언론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어떻게 하겠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정치권력이 언론사나 언론인은 탄압할 수 있어도 언론을 이긴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뒤흔든 영웅호걸도 여론의 도도한 물결에 떠내려가는 일엽편주에 불과하다. 언론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칼을 빼들고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에 비견할 수 있다.
지금은 일이 잘 안 되는 것을 언론 탓에 돌릴 때가 아니다.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요 라고 할 때이다. 대통령이 정치, 경제의 현안을 잘 챙기고 개인적 처신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눈에도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면 감히 언론이 어떻게 대통령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어려운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그런 문제보다도 언론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난관을 만들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눈을 안으로 돌려 “내 탓이요” 할 때 정권과 언론이 얽힌 이 난맥상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영/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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