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한 종교단체가 몇년 전 서울에서 대규모 선교대회를 준비했다.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많은 신도들이 솔선수범했고, 한 여신도는 주위에서 칭찬을 들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 여신도는 도자기 전시회를 맡았다. 이 전시회에서 모은 기금을 선교대회에 보태는 일이 중요한 만큼 관심과 기대도 컸었다. 그런데 이 여신도는 신도들과 성직자들을 실망시켰다. 전시회에서 모금한 돈을 모두 챙겨 어디론가 사라진 것 이다.
최근 LA에 들른 한 성직자는 당시의 일로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치렀다고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그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는 이 성직자는 공금을 그것도 신도가 가져갔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교단 책임자, 변호사와 법적으로 대응할 태세를 갖췄고 변호사도 “소송하면 이길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이 성직자는 기도를 하면서 여신도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송에 합세했던 변호사도 “성직자가 신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웠고 부정적인 영향을 남길 것을 우려했다”며 소송철회 방침을 반겼다고 했다. 여신도의 사죄가 없었지만 없었던 일로 했다. 조건 없는 용서의 실례이다.
종교처럼 물질세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철학의 영역에서도 무조건적 용서는 가능하다. 한 때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인도의 철학자인 라즈니시가 하루는 ‘용서’를 주제로 공개강좌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예수의 ‘왼뺨, 오른 뺨’ 얘기가 나왔다. 그러자 라즈니시를 못마땅해 하던 한 청중이 그의 언행일치를 시험하기 위해 한쪽 구두를 벗어 연단을 향해 던졌다. 장내는 썰렁해졌다. 몇 초가 지나자 라즈니시는 구두를 던진 청중에게 “다른 쪽 구두도 벗어 던지시오”라고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처럼 종교적인 또는 철학적인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나 사죄를 전제로 하지 않고도 성립된다. 대가 없이 피해자의 일방적인 용서로 일이 마무리된다. 세속적인 용서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긴 하지만 예삿일은 아니다. 자신이 땀흘려 번 돈이나,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공금을 꿀꺽하고 도주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범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얼굴에 주먹질을 한 사람에게 한번 떠 때리라고 고분고분 얼굴을 내밀 사람도 없을 게다.
일상사에서는 상식 속에 문제의 해법이 들어 있다. ‘조건 있는 용서’ ‘사과 또는 사죄 후 용서’가 그것이다. 일을 그르치거나 악화시킨 장본인은 ‘무조건적 용서’에는 결격이다. 커뮤니티 성금으로 마련한 노인회관 건물 매각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노인회장이 건물을 임의로 팔려고 내 놓았으나 한인사회의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거래가 중단됐고 한인회 등 단체들이 참여하는 ‘노인회 정상화추진위’가 발족돼 노인회 문제를 직접 챙길 채비를 차렸다. 구체적인 대응방안에는 이견이 있지만 노인회 정상화를 위한 대의명분에는 한마음이다.
말썽을 일으킨 노인회에 모든 것을 맡겨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방안이 있고, 추진위가 이라크의 과도정부처럼 노인회를 지원하면서 업무에 깊숙이 간여하는 방안이 있다. 두 가지 중 어느 방안으로 낙찰이 되든, 아니면 제3의 절충안이 나오든 중요한 것은 공금을 잘못 운용한 책임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일을 이토록 꼬이게 한 노인회장에 대한 한인사회의 ‘용서’의 문제다.
오랜 세월 노인회를 이끌면서 이룬 ‘공’을 감안해 ‘과’를 과감하게 용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용서’는 안 된다. 노인회 잡음에 대한 노인회장의 진상 공개와 사과가 전제돼야 용서도 가능하다. 노인회라는 단체에 대한 엄중한 심판에서도 그렇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부 봉사단체장들의 잘못된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노인회는 반드시 살려야 한다. 노인들을 위해 할 일이 수두룩하다. 노인회가 만신창이로 문을 닫으면 또 다른 노인단체가 들어선다 해도 신뢰를 얻기 힘들다. 노인들의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리게 된다. 그러므로 노인회는 반드시 노인들의 사랑방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려면 노인회장의 ‘어른스런 결단’이 선행돼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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