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떠난다. 기회만 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사람이 줄지어 서 있다. 미국 이민자수가 11년만의 기록이다. 해외거주 한인이 600만을 넘었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층이 절반이 넘는다.
왜 떠날까.
전쟁이 나면 해외로 나가겠다. 이화여대생의 40%가 그런 응답을 했다. 연세대생 92%는 할 수만 있다면 병역의무를 회피하겠다는 생각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보도 내용이다.
그 스토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중산층 부모들은 유학차 미국에 가 있는 자녀들에게 눌러앉으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전쟁공포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의 아르헨티나화를 우려한다.
뉴욕타임스가 전하는 이야기는 앵글이 상당히 다르다. 요즘의 미국 이민은 주로 엘리트 계층의 이민으로 물질적 풍요보다는 미국적 스탠다드에의 도전이 주목적이라는 것이다.
보다 도전적인 삶을 위해서. 전쟁 불안 때문에. 왜 떠날까- 이 물음에 대해 미국 신문들이 내린 답이다. 맞는다. 분명 그런 측면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만이 이유일까.
“짐작은 했지만 현실은 더 참혹했다. 프랑스·캐나다·러시아 등지 대학생들의 75% 이상이 다시 태어날 경우 자신의 모국을 선택할 것이라고 답한 반면 고려대생의 30%만이 그런 대답을 했다.”
2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는 이렇다. 한국인의 70%가 부패문제를 가장 심각히 보고 있다. 60% 이상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사회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20∼30대의 절반이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반응이다.
젊은 세대뿐이 아니다. 한국 기업도 74%가 3년 내 한국을 떠날 계획이라는 거다. 한국무역협회의 최근 보고다. 이런 전망도 덧붙였다. 첨단산업까지 해외로 나감에 따라 응답 기업의 57%는 앞으로 4∼5년 내 산업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왜 떠날까.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2년 전 그 답은 이랬다. “학생들이 조국에 절망한 요인은 다름에 있지 않다. 현실정치의 추악함과 무능력에 있다.”
“과거에는 꿈이 있었다. 가난을 이겨내려는 꿈이 있었고 민주화에 대한 꿈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의 꿈은 있는가.” 한국의 현실과 관련해 한 교육가가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사회에 권위는 없고 이기주의는 심화되고 있다. 자격 있는 지도층이 의미 있는 꿈을 이야기 할 때만이 사회의 꿈이 되고 젊은이들의 꿈이 된다.” 한국 사회는 이미 꿈을 상실한 사회라는 말이다.
왜 떠날까. 그 질문의 윤곽이 잡혀가는 것 같다. 꿈을 상실케 하는 ‘그것’의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나서다. ‘그것’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야만성이 아닐까.
정치권이 그 원천인 야만성 말이다.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추해지고 꿈과 이상을 지키려면 비웃음거리가 되는 부조리, 그게 정치권,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야만이다.
개인은 시빌리티(civility)를 통해, 국가 사회는 법질서를 통해 야만성을 면한다. 이게 통째 무너졌다. 양심선언을 한 정치인은 유죄가 확정되고 법망을 교묘히 피한 정치인은 득세한다. 이게 한국의 정치권이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야만성은 더 심화될 것 같다. 문화지수가 극히 낮아 문화맹(文化盲)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치무대를 휘젓고 있어 하는 말이다.
사실 문화맹 지도자는 컴맹보다 훨씬 위험하다. 컴맹은 자신의 불이익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문화맹 지도자는 소속 집단 구성원에게 막대한 불편을 가져온다.
특히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계화 시대에 문화맹 지도자는 이웃 나라의 오해와 분노를 사기 쉽다. 문화적 감각이 전혀 없기 때문으로, 그로 인해 때로 선린관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데 문화맹은 자신이 문화맹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피해는 한국 사회 곳곳에서 감지된다. 사회의 각 요소가 저마다 대립상황에 돌입해 있다. 노와 사, 동과 서, 또 세대간의 대립이다. 관점이 배타적이다. 극단적 편가르기다. 야만성의 극치라고 할까. 그 보이지 않는 저변에는 친(親)북과 반(反)북의 해묵은 싸움이 깊게 잠복해 있는 것 같아 더 불안하다.
그 극단의 편가르기가 밖으로는 어떻게 표출될까. “세계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주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면서 빚어지는 갈등이다.” 한 미국인 논객의 한가한 평이다.
왜 떠날까. 왜 젊은이들은 저마다 이민을 꿈꾸고 있을까. 다시 던져보는 물음이다 그런데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자꾸 앞선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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