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헤치는 초록 물고기 장미영
벚꽃의 기억이 남아있는 4월에 그를 만났다
여느 남녀처럼 2년간의 교제는 계속됐다
솔직하게 이혼의 이유를 대지 못하는
그의 불성실이 싫어졌다
퇴근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아파트지만 혼자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어둠이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문을 열면 실내는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어둠에 조용하기만 하다. 간간이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공간을 가득 채운 어둠을 밀어내지는 못한다.
이 공간에는 살아있는 것이 없을까. 얼마 전 아들의 성화에 기르기 시작한 물고기가 생각났다. 부엌 옆 복도에 가져다 놓은 작은 어항에 한 마리 물고기가 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큰길에 인접한 단지의 가장 안쪽에 있는 아파트는 불을 켜지 않으면 항상 실내에는 어둠이 가득하다.
갑자기 물고기가 어항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가 어항에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어항을 빠져나와 실내에 가득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초록 꼬리를 흔들며 유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헤치고 유유히 실내를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봄이 한창인 4월인데도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요며칠 드물게 비가 오더니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낮에 비가 와 창가에는 미처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맺혀있다. 로스앤젤레스의 4월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비는 실내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불을 켰다. 전혀 다른 세계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불을 켜기 전의 세상이 어둠 속에 물고기가 노는 곳이었다면 불을 켠 실내는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창가에 걸려있는 물방울을 보면서 문득 비에 젖은 벚꽃이 생각났다. 왜 젖은 벚꽃이 떠오를까. 그것도 바다 저편의, 이제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곳에서 보았던 벚꽃이 생각나는 것일까.
박정우라는 남자. 그를 본 곳이 창경원 앞이었는지 캠퍼스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비 내린 보도에 떨어진 벚꽃의 모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그때도 4월이었을 거야. 비에 젖은 벚꽃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4월에 그를 만났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여느 남녀처럼 2년간의 교제는 계속됐다.
그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은 기억은 없다. 장래를 약속하거나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등의 거창한 명분도 없이 그저 만나는 횟수를 늘려갔을 뿐이다.
“설계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가는데 같이 가자.”
어느 날 그가 집에 바래다주면서 한 이 말이 프로포즈였을까. 아니 그가 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결혼했을 것이다. 목적이 없는 그와의 만남은 헤어질 이유도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는 내 곁에 없고 나는 매일매일 익숙해지지 못한 어둠 속으로 다시 찾아들고 있다.
동민이가 없어서 그런지 아파트는 더 빈 것 같다.
어린이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 동민이를 데리러 갔더니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오겠다고 우겨댔다. 동민이 눈길이 가 있는 곳에는 제 또래의 한 아이가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동민이가 친구들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아이였다.
“오늘 집에 데리고 가서 우리 아이와 함께 재우고 내일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 줄게요”
다섯 살 된 아이를 둔 엄마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은 그 여자는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들 친구의 아빠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거들었다.
“동민이가 우리 아이하고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하던데요.”
동민이가 원하는데 굳이 친구 집에 가서 자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번거로우실 텐데…”
그다지 할말이 없어서 말꼬리를 흐리면서 동민이를 그 아이의 곁으로 보냈다. 아이를 보내고 차에 올라타는데 동민이와 친구의 들뜬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동민이가 없는 아파트에 혼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남편 없이 모자가 단둘이 살면 더 애틋한 정이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것에 대해 당연히 죄책감을 가져야 하고 따라서 아이에게 그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니면 엄마와 아들은 결손가정의 피해자이고, 피해자인 엄마와 아들은 서로의 불쌍한 처지를 동정해 남다른 끈끈한 정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혼한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살아가는 이유’인 동민이가 없는데도 그다지 허전하지 않다. 학교가 끝나 데려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가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은 실감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그다지 외롭다거나 어느 한구석 텅 빈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엄마하고만 산다는 것이 동민이에게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아빠와 떨어져 산다고 다른 아이들보다 불쌍할 것도 없고 엄마가 아빠 사랑까지 의무적으로 베풀어야 할 이유도 없다.
동민이가 보고 싶기는 하지만 하루 밤만이라도 나만의 온전한 공간이 생기면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방안을 둘러보던 눈길에 전화기 자동응답기 불빛이 깜박이는 것이 들어왔다.
‘정우겠지…’
어린 아들과 둘이 사는 집의 전화기에 녹음을 남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집에 없을 때 회사로 전화하거나 휴대폰으로 걸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우는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필요한 용건을 자동응답기에 남긴다. 응답기는 편리한 점도 있다. 상대방과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때 자신의 용무만을 간단히 남길 수가 있다. 정우가 내가 없을 시간에 맞춰 전화기에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삑’하는 기계 음에 이어 자동응답기의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흘러나왔다.
“나야, 동민이는 잘 있고… 이번 주말에 아이 데리러 갈게.”
이혼한 후 얼마간은 동민이 안부를 묻는 정우의 말을 수화기를 통해 직접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우는 전화기에 녹음을 남겼고 이제는 이것만이 정우와 나를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되고 말았다.
그다지 할 얘기도 없는 나와 대화하기는 싫고 동민이의 안부는 궁금한데 응답기처럼 편리한 것이 어디 있을까.
“나야, 동민이는 잘 있고… 이번 주말에 아이 데리러 갈게.”
최근 들어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남겨진 정우의 통화에 토씨도 하나 틀리지 않은 이 말만을 들어온 것 같다.
그는 얼마나 편할까. 사무적으로 한마디를 전화기에 남겨 놓은 후 나로부터 아무런 전화가 없으면 동민이가 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그리고 동민이게 문제가 생기면 명색이 아버지인 그에게 내가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도 하고 있겠지.
6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그와 나에게 남은 것은 전화기를 통해 듣는 동민이 안부가 전부다. 아마 동민이라는 인연의 끈이 없었다면 그와 나는 지구와 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완벽한 남남이 됐을 것이다.
내키지 않은 저녁을 거르고 책상에 앉았다. 오전에 광고 카피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훑어보면서 문구를 떠올렸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저녁을 먹은 후에 동민이와 책상에 앉아 나는 광고 문구를 쓰고 동민이는 색연필로 포키몬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런 집안 풍경이었다.
옆에서 귀찮게 하는 동민이의 말을 받아주면서도 했던 일인데 오늘은 하기가 싫다. 환경이 변하면 생각도 바뀐다던데 다섯살짜리 꼬마가 하루 저녁 없다는 것도 환경의 변화일까.
열었던 컴퓨터 파일을 닫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눈길을 창가로 돌렸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수진 언니한테나 갈까.’
길 건너편 아파트에 혼자 사는 언니다. 서른여섯 살 나이의 여자가 혼자 산다면 당연히 주위에서 이혼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독신주의자다. 그렇다고 해서 독신주의를 무슨 거창한 구호처럼 외치는 여자도 아니다. 오히려 결혼 안 하는 이유로 독신주의를 말하는 여성들을 은근히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저 혼자 사는 것이 편해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어울릴 것이다.
거래 회사에서 그래픽을 담당하는 수진 언니와 친해진 것은 그녀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우연히 퇴근길에 차를 내리다가 길 건너편 아파트로 들어가는 그녀를 봤고 그것이 계기가 돼 집을 오가면서 친해졌다.
한번은 저녁초대를 받고 수진 언니가 왔다. 습관처럼 전화기 버튼을 누르자 그때 마침 전화기에서 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 동민이 아빠 이름이 혹시 박정우씨 아니니?”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수진 언니가 놀라 말을 던진다.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언니, 정우씨 알아?”
“맞구나, 정우씨 맞아, 세상 참 좁다 얘…”
수진 언니가 집에 왔을 때 마침 녹음을 통해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극적일 뿐 언니가 정우를 아는 이유는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었다.
“설계 사무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해야 할 일감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어. 몇번 우리 사무실에 박정우씨가 들른 적이 있었는데 내가 담당이라 주로 업무 관계 이야기를 하지. 정우씨와 말할 때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남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사실 수진 언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남편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 한 적이 없다. 나도 하고 싶지 않았고 언니도 내가 전에 같이 살았던 남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그때 ‘내 남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라는 언니의 말에 ‘남편이 아니라 전남편’이라고 웃으면서 얘기했을 뿐 자동응답기가 가져다 준 기막힌 우연을 기회로 정우와의 결혼과 이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수진 언니도 마음 한구석에 궁금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쳤다 싶었던 비가 밤이 깊어지면서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동민이가 없어서 그런지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로스앤젤레스에 비가 오면 무언가를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밖으로 밖으로만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추스르고 삶에 대한 얄팍한 고민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비에 익숙해 질 때도 됐는데 로스앤젤레스는 비가 자주 안 내려 아직까지도 나는 비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내가 비에 길들여지지 못하듯 정우, 그 남자도 나에게 길들여 들지 못한 남자였다.
6년의 결혼생활. 서로가 그다지 뜨거운 열정을 갖고 살지는 못했어도 아이도 낳고 그런 저런 눈에는 제법 단란한 가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자유롭고 싶어…”
어느 날 밤늦게 들어온 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롭고 싶다고… 내가 언제 속박했다고…’
아이까지 둔 30대의 가장이 ‘자유’를 운운하며 무얼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 나이에 자유를 찾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꿈꾸는 자유를 잊고 사는 나는 속물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의 말은 계속됐다.
“당분간 헤어져 있는 게 어때?”
왜 처음부터 말을 편하게 하지 못할까. ‘자유’라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해야 조금은 품위가 있는 것일까. ‘헤어지자’라는 구체적이고 쉬운 말이 있는데 말이다.
“헤어지자고, 이유가 뭐죠?”
내가 그에게 이유를 물은 것은 나를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대라는 뜻이었다기보다는 ‘자유’로 시작해 ‘헤어지자’로 이어진 그의 말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우리 결혼했던 것처럼 이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래.”
정우의 이 말은 ‘자유’와 ‘헤어지자’의 중간쯤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나는 왜 이같이 중요한 순간에 진지하지 못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겨우 그게 이유인가요?”
이혼을 눈앞에 두고 고개를 드는 나의 장난기와 여유는 이미 이혼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핸드폰에 남겨진 여자의 목소리. 그 핸드폰을 보란듯이 방치한 남편의 의도.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나의 자존심.
매우 구체적인 이런 상황들이 한데 모여 ‘자유’라는 거창한 이유로 이혼하는 부부를 만들고 만 것이다.
막연한 수사로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그를 보면서 갑자기 ‘솔직하게 이혼의 이유를 대지 못하는’ 그의 이혼에 대한 불성실(?)이 싫어졌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혼이라는 현실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았었다.
이혼했다는 사실을 처음 실감한 것은 그 후 4개월이 지나 불꺼진 아파트에 동민이를 안고 혼자 들어왔을 때였다.
비가 내리는가 했듯이 간간이 천둥과 번개도 치고 있다. 흐리게 밝혀져 있는 실내는 번개가 칠 때마다 순간 순간 다시 깨어났다.
천둥소리가 지나간 실내는 일순간 정적에 빠지다가 다시 창 밖의 비 소리와 도시의 자잘한 소음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때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아니 벌써 몇번이나 전화벨 소리가 들렸었는데 천둥과 번개에 정신이 팔려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여보세요, 거기가 동민이네 집이죠.”
애써 진정시키고 있지만 다급함이 수화기 끝에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민이 친구 엄마 목소리였다. 학교에 애를 데리러 갔을 때 나이보다 젊게 보였던 그 엄마였다.
“예 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저…”
그때 천둥소리가 들렸다. 천둥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전화기 상대편이 말을 잇지 못해 중단했는지는 모르지만 한순간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요?”
전화의 용건을 묻는 나의 목소리는 이미 불길한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동민이가요… 동민이가요… 우리 애랑 놀다가 2층 덴에서 떨어졌어요.”
“동민이가 어떻게 됐다고요?”
이제까지 방안에 가득하던 빗소리와 소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전화기 저편의 그 여자가 전해 줄 아들의 상태만이 나에게 들리는 단 하나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여기, 병원이에요. 응급차로 실려와 수술을 받고 있어요. 의사 말로는 머리를 다쳤다고 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런 말 자격도 없는데… 어떻게 하죠…”
동민에 상태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를 털어놓은 그 여자는 끝내 울먹이며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갑자기 조금 전 저녁에 아빠 없이 엄마가 혼자 키운다고 해서 아빠 사랑까지 해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한 가닥 가책처럼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정말로 이상했다.
그 여자와 전화를 끊고 난 후 잠시동안 무엇을 할 줄 몰랐다. 병원에 가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항상 같은 장소에 놓여져 있는 자동차 열쇠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정우에게 전화를 걸까, 아니면 수진 언니에게 전화를 할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급하게 아파트를 나와 차고로 갔다. 그 여자가 일러준 병원은 다행이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 수진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슨 일이 생겼냐’고 묻는 언니에게 운전 내내 무섭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언니에게 동민이가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수술 받고 있다고 간신히 전한 것은 병원에 도착하면서였다.
병원에서 기다리던 동민이 친구 엄마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를 맞으며 전화기에 했던 말들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들리지 않았다.
2시간 가까이 수술실 밖에서 기다린 후에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의사에게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애가 살았어요 죽었어요’라고 다그치고 싶었다. 다만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내가 말을 해 버리면 동민에게 정말로 무슨 큰 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뇌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서는 상태를 두고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같이 모호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중에도 동민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원으로 오면서 짓눌렸던 가슴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어디 있죠.”
“지금 회복실에 있습니다. 서너 시간 정도 상태를 본 후에 입원실로 옮겨질 겁니다.”
마치 목석을 수술한 것처럼 의사는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한마디를 남기고 오피스로 들어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복도에 놓여진 의자에 주저앉으니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의사를 보고 한번만이라도 아이를 보여달라고 할 걸.’
폭풍이 휘몰아친 후 정신을 수습하니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얼굴 위에 정우의 얼굴이 겹쳐졌다.
간호사에게 회복실에 있는 아이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보호자는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의자에 앉아 긴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그저 동민이에게 큰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것뿐이다. 머리를 복도 벽에 기댄 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희야!”
꿈결에서 들리는 소리인 줄 알았다. 수진 언니가 내 팔을 흔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몽롱한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로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동민이는 어떻게 됐어?”
수진 언니의 물음에 대답 대신 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동민이는 지금 어디 있어?”
수진 언니의 말에 몸을 뗐다.
바로 그때 수진 언니의 뒤로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였다. 동민이 아빠였다. 조금 전 의사와 만난 후 그 사람 얼굴을 떠올렸는데 생각 속이 아닌 실체로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나지막한 정우의 목소리는 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냐는 추궁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무언가 정우로부터 질책이 있어야 할 상황인데 그는 차분하기만 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정우의 질책에 대항할 이유를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돈으로 동민이를 기르지만 나는 하루종일 신경 쓰고 살아야 해요. 내가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당신과 나와 같이 살았어도 사고는 났을 거예요.’
차라리 정우가 화를 냈다면 나도 속에 있었던 말을 이렇게 쏟아 부었겠지만 그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머리를 다쳤데요?”
순간 ‘머리를 다쳤어요’라고 할 것을 ‘머리를 다쳤데요’라고 말해 버린 것을 후회했다. 마치 내가 동민이와는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이미 나온 말이었다.
정우와 같이 온 것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는데 수진 언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 전화 받고 내가 정우씨에게 연락했어. 동민이는 지금 어디 있어?”
“회복실에 있는데 서너 시간 기다려야 볼 수 있대요.”
이 말 이후로 복도에 선 세명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서로는 어색한 표정으로 근심에 찬 눈빛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간 비를 뿌렸던 날씨는 로스앤젤레스의 전형적인 4월 날씨로 돌아왔다. 현재의 동민이 상태로는 별다른 후유증이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은 후 아이를 퇴원시켰다.
또다시 생활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퇴원 후 일주일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동민이 곁에 있었다. 그리고 동민이가 다시 학교로 가고, 내가 회사에 출근하면서 우리의 생활은 말 그대로 사고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한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퇴근 후 동민이를 데리고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어둔 실내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렸던 자동응답기의 불빛이 더 이상 깜박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었다.
언제부터인지 정우의 발걸음이 시작됐다. 정우와 나, 아니 정우와 동민이를 연결시켰던 유일한 통로였던 전화기 불빛이 사라지면서 정우가 아파트를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가고 집에 바래다 줄 때도 아파트 앞에서 전화하고 입구에 아이를 놓고 갔던 그가 아파트에 발걸음을 한 것이다.
느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가 왔음을 직감했다.
“들어오세요.”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혼했다는 사실이, 배신당했다는 분노가 나에게는 그의 방문을 막을 하등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독설을 퍼붓는 것보다 이러한 의도적인 무관심과 태연함이 그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라는 알량한 자존심도 있었다.
“동민이도 이제 많이 나았으니 내일 바닷가에나 놀러가지.”
나들이? 그러고 보니 벌써 주말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정우와 함께 동민이를 데리고 바닷가를 가는 것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닌 만큼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내일 나들이를 간다. 가족 아닌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가는 것이다.
봄 바닷가는 참으로 애매하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해왔었다. 여름바다의 뜨거운 열정도 없고 겨울 바다의 차가운 낭만도 없는 봄 바다. 미지근하면서도 약간은 거추장스러운 햇빛이 드리워지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싫을 것도 없는 봄 해변가의 일상.
동민의 손을 잡고 한 걸음 앞서가는 정우와 그 뒤를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가는 나의 모습은 그대로 봄 바다를 닮았다.
“이렇게 셋이 가면 남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가족으로 보이겠지?”
이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갑자기 잊고 살았던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일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닷가의 나들이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동민이는 모처럼 아빠 엄마와 같이 나왔다는 사실에 마냥 들떠 있었고 모래사장을 헤치는 아이의 모습을 정우와 나는 여느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내는 은근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햇빛을 즐겼다.
“지금도 나를 많이 미워하지?”
“아니요.”
짧은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를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를 미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이유도 없이 나를 떠났듯이 나도 그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핸드폰에 목소리를 남겼던 그 여자에 대해서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떠난 가장 큰 이유인 그 여자의 일상이 나에게는 중요할 것도 없고 그것을 묻을 만큼 궁금증이 큰 것도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했던 그 여자는 서희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다 지나간 일인데, 새삼 그 얘기를 왜 꺼내죠?”
이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그 여자에 대한 어떤 것도 알고 싶지 않았고 가슴에 조금 남아있던 궁금증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
정오를 조금 넘어선 시간에 바닷가 근처의 맥도널드에 갔다. 아빠의 목에 올라 탄 동민이는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같이 살면서 동민이를 저렇게 목에 태운 적이 있었나하고 생각해 봤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저렇게 한다고 우리가 가족처럼 보일까.’
속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정우는 음식을 주문하고 날랐다.
“결혼해서 가정이라는 의무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속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을 나와보니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걸 알았어.”
식사가 대충 끝나고 동민이가 플레이하우스로 들어간 직후 정우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속박이고 자유고 그런 말 이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얼마 전 동민이의 사고를 겪었고 하루하루 생활이 바쁘기만 한 나에게 속박이나 자유니 하는 말은 사치처럼 들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잡히지 않는 것들에 연연해 막연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를 둘러싼 생활들이 너무나 구체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학교에 보내고 회사에 가서 일하고 집에 돌아가 밥하고 청소하고… 이 모든 것을 손에 잡히는 실체로 존재하는데 자유니 속박이니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차를 타고 집에 들어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아파트 뒤켠으로 넘어가는 해가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고 해를 등진 정우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잘 있어. 또 연락할게.”
“오늘 고마웠어요.”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무엇이 고마웠는지는 모르겠다. 모처럼의 시간을 내서 나까지 데리고 나가 ‘가족 흉내내기’를 한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 아니면 인사치레 말속에 그와 나, 동민이 셋이 함께 한 시간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은연중에 들어 있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며칠 후 정우가 회사로 전화를 했다. 만나자고 했다. 동민이 때문에 거절할까도 했지만 수진 언니를 떠올리고는 이내 승낙했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는 수진 언니에게 동민이를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약속 장소에 정우는 먼저 나와 있었다. 나이에 비해 조금은 더 성숙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찻잔이 두 사람 앞에 높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가에 걸쳐 있던 해가 떨어지면서 어느새 밖은 서서히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정우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다시 한번 물었지만 정우는 대답이 없어, 더 이상 묻지 않고 어두워지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 다시 합치자.”
창 밖을 바라보던 나는 정우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야 할 차례인 것처럼 느껴져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집을 나가서 우리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어.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애정이 남아 있나도 생각했어.”
“애정을 지금 생각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에요.”
정우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약간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이내 그 얼굴에는 옅은 어둠이 스쳐갔다.
“내가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당신이 그렇게 나를 보낼 줄은 몰랐어. 서희라는 여자의 자존심이 그렇게도 강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 지금 생각해도 이혼을 앞에 놓고서도 당신이 내세운 것은 자존심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동안 두 사람 사이를 깊은 침묵이 가로막았다. 그사이 어두워지는 밖은 실내를 더욱 아늑하게 만들고 있었다.
“동민이의 사고를 계기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어. 나의 사치스런 감정이나 당신의 자존심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모두 하찮은 것일 수밖에 없어. 동민이가 며칠간 입원해 매일 볼 수 있었던 시간들이 행복한 때인 것 같아.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 당신이 받아준다면.”
정우는 많을 말을 했지만 들어오는 것은 ‘자존심’이라는 말뿐이었다. 이 남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자신의 사치스런 감정이 하찮다고 하면서 내 자존심도 거기에 끼워 넣고 있었다.
내가 자존심 때문에 떠나가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나의 자존심이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속박이었을까.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만 동민이를 한번쯤 생각해 봐.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게.”
정우의 말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왔다. 그는 ‘용서’라는 말 대신해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인적 없는 거리에 내려앉은 어둠은 그 짙은 그림자를 내 마음속에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동민이와 사는 것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고 일하고 아이 키우기도 그다지 힘든 노동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한 남자가 이 익숙해져 가는 틀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다.
한 때는 이 틀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았던 사람이 그 속박을 떠났다가 다시 속박을 찾아서 온다고 한다.
언니 집에서 데려온 동민이는 낮에 학교에서 얼마나 뛰고 놀았는지 침대에 올라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수진 언니에게 얘기라도 해볼까. 언니는 어떤 말을 할까. 아마도 다시 결합하라고 할거야.
수화기를 들었으나 이내 몇 개의 번호만 누른 뒤 끊었다. 언니에게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그게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나의 틀, 예전엔 우리의 틀이었던 이 곳에 그가 돌아온다고 하는데 수진 언니가 나에게 해 줄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이혼 후의 생활. 그 생활 속에서 정우와 나를 이어준 유일한 끈은 동민이었다. 그가 전화기에 음성을 남겨 놓아야 할 이유도 동민이었고 어설픈 가족 흉내를 내며 바닷가를 찾았던 것도 동민이의 사고 때문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지금 무엇이 남아 있을까. 동민이를 생각해서 그를 다시 받아들여야 하나. 결혼의 과정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놓은 실체인 동민이를 위해 다시 살아야 하는가. 어설프게 가족 흉내를 내면서 그럭저럭 살아야 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머리 속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길고 길었던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아침이다. 일찍 잠이 들었던 동민이는 깨우지도 않았는데 음식 준비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출근과 아이 학교 준비로 부산한 그런 아침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하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다시 시작된다.
다만 오늘 아침에 다른 것이 있다면 밤새 머리 속을 짓누르던 생각이 떠나지 않고 귀찮은 꼬리처럼 따라 붙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회의와 광고주에게 프리젠테이션 할 자료들을 준비하느라고 오후 내내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겨우 책상에 앉아 한숨을 돌리자 이내 잠시 동안 잊었던 생각들이 다시 스물스물 떠오르기 시작한다.
“연락해, 기다릴게.”
정우의 말은 어지럽게 맴돌고 있다. 마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처럼, 수험자의 답을 기다리는 답지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언뜻 넘기는 수첩에 쓰여진 정우의 전화번호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와의 만남, 결혼생활, 이혼, 동민이 사고… 이런 것들이 머리 속에서 되살아났다.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긴 한숨을 가다듬 었다.
그리고는 정우의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닫았다. 다시는 열리는 않을 것 같은 무게가 수첩에서 느껴졌다.
그 순간 퇴근 후 돌아가는 아파트의 물고기가 생각이 났다. 초록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그 물고기를 떠올렸다. 물고기를 생각하니 머리 속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지난 밤 짓눌렀던 모든 생각들이 일순간에 거대한 출구로 물이 빠져나가듯 사라져 간다. 물고기의 신선함과 생명력이 온몸에 생기를 돋우고 있다.
이제 오후 4시. 앞으로 두시간 후면 동민이를 데리고 아파트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어항 속에서 떠도는 초록 물고기를 다시 볼 것이다. 그 공간에서 나는 또 저녁을 준비하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살고 또 그렇게 내일을 맞을 것이다.
홀로 어둠을 헤치는 초록물고기처럼.
타인의 경험 공유 힘들어
당선소감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러한 생활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감정도 쉽게 전해져 오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글의 주제로 삼아보았다. 망설이면서 응모작을 보냈지만 스토리의 비약으로 내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고 정연한 논리를 세우기에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
남몰래 준비해온 많은 시간들이 입상의 결과로 돌아온 것에 대해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부족한 작품에 관심을 보내주신 심사위원께 감사 드린다.
심사평
전개
송상옥<소설가>
올해 응모된 단편 소설은 50편이 넘었다. 응모자의 거주지역 분포가 북미 곳곳에 이르고 있는 만큼 담고 있는 내용도 광범위해서, 미국살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망라되었다 할만하다. 이번 경우 입상작 모두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동성애, 마약, 이혼문제등이 다루어졌다는 데서 흥미롭다. 우연이기 하나, 그것들은 우리 사회의 비켜갈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당선작 :‘한기’(이경숙)-언제나 가슴 뿌듯한 자랑스러운 아들이, 평소에 자신과 남편이 그지없이 혐오하는 동성애자 임을 알고(아들이 뒷 골목 게이 술집에서 여자로 변장, 선정적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어머니. 몸에 오싹 한기만 느끼고 끝날일이라면 좋으련만. 결말로 향한 복선이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여간다. 작의적이 되기쉬운 설정인데, 무리가 없다. 그만큼 역량이 돋보인다.
▲가작 :‘어둠을 헤치는 초록 물고기’(장미영)-남편이 내세우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이혼하게 된 주인공. 아이하나 데리고 어둠과 같은 세파를 혼자 헤쳐나가려는 생의 의지로 ‘초록’ 물고기를 내세웠으나 소설 속에서도 실제 나오지 않는 ‘초록’ 물고기를 굳이 상징으로 삼을 건 없다. 소설에 나오는 어항속 물고리로 처리했어도 될 것이었다. 능숙한 펴현력에 비해 내용이 약하다.
▲가작 :‘폴과 제이슨’(이명자)-부모와 두아들, 단란해 보이던 가정이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 비극은 집안의 기둥이요, 희망이었던 변호사 아들의 죽음으로 정점에 치닫는다. 동생(나-소설속 화자)은 마약 때문에 고초를 겪다가 극복하는데, 모범생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던 ‘형’은 성공의 절정에서 쓰러지고. 가족들인 부모와 ‘나’는 그의 죽음에 나름의 죄책감을 갖는다. ‘형’을 둘러싼 설정에 무리가 있는게 흠이다.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작품들은 ‘차이나타운에서 떠나는 전차’, ‘이브의 심연’‘종이별’,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다’등이다.
<끝>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