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 와인 어울리는 잔 고르기
약 7~8년 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같이 학교를 다니며 알게된 사람이 나를 청담동에 위치한 라이브 재즈클럽 겸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음향시설이 잘 된 그곳의 무대에서는 실력있는 음악가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고, 몇가지 안 되는 음식 메뉴와 함께 대단히 감동스러운 와인 리스트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 와인 리스트에 적혀있는 와인 중 대부분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리스트에 적혀있을 뿐이어서 실제로 마실 수 있는 와인은 한두가지 종류인게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와인을 주문한 후 웨이터가 와인을 따라주는 와인잔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내가 주문한 와인은 보르도산 적포도주였는데, 와인잔은 디저트 와인에나 어울릴법한 볼이 아주 얕고 조그만 잔이었기 때문이다. 와인에 적합한 다른 잔은 없냐고 묻자, 웨이터가 그 잔이 모든 와인에 다 어울리는 가장 적합한 잔이라고 오히려 훈계를 했던 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맛과 향 강한 적포도주
볼이 넓고 깊은 잔 제격
델리키트한 백포도주는
볼좁고 작은 것이 좋아
와인은 품종에 따라 그 최고의 맛과 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잔에 따라 마셔야 한다. 와이너리에서 시음을 할 때도 가끔 최고의 잔을 준비해서 시음하러 온 손님들을 대접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면 그 와이너리의 방침과 철학이 드높아 보인다.
나파 밸리의 마이너(Miner) 패밀리 와이너리에서는 시음용 와인잔으로 슈피겔라우 글래스를 제공하는데, 주인인 데이빗 마이너는 이에 대해 “손님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우리 와이너리까지 방문을 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와인들이 최고의 맛을 선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와서 좋은 글래스로 시음을 한 곳의 와인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을 때가 많다.
같은 와인이라도 마시는 잔에 따라 맛과 향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와인을 만들기 위해 그 품종에 알맞은 토질을 찾고, 흙을 고르고, 좋은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좋은 오크나무통 속에 알맞은 기간 숙성을 시키는 등 많은 수고가 동반된다.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인 후 마실 때 그 와인에 가장 적합한 와인잔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적으로 맛과 향이 강하고 힘찬 적포도주를 마실 때는 볼이 좀 더 넓고 깊은 와인잔으로 마셔야 하고, 델리키트한 백포도주를 마실 때는 볼이 좁고 작은 잔으로 마시는 것이 좋다.
샴페인의 경우 볼이 좁고 긴 잔에 따라 마시면서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즐기면서 그 맛을 더욱 즐길 수 있고, 그 밖에도 디저트 와인, 셰리, 포트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내용물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잔이 있다.
와인글래스만을 전문으로 개발하여 만드는 리델(Riedel)사나 슈피겔라우(Spiegelau)사에서는 이미 수십년전부터 어떻게하면 그 내용물의 맛과 향을 더욱 즐길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그에 맞는 잔을 개발하여왔다.
◀샴페인(Spiegelau Champagne)- 샴페인과 스파클링 와인을 즐기기에 적합한 잔이다.
샴페인의 특징인 작은 기포가 생성되고 잔 표면으로 올라가는 것을 최대한 즐기며 마실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고, 샴페인을 혀의 끝으로 느낄 수 있도록 잔이 매우 좁아서 기포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몽라셰(Riedel Montrachet)- 샤도네 중에서도 바디가 좀 더 풍부하고 알콜 농도가 높으며 신맛이 덜한 부르고뉴산 몽라셰 등에 어울리는 잔이다.
과일향을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볼의 크기가 크지만 입구는 넓은 편이다. 넓은 입구는 와인이 잔에서 입으로 흘러 들어갈 때 혀의 신맛을 느끼는 부분 (혀의 양 옆 쪽)에 제일 먼저 닿을 수 있도록 돕는다. 신맛을 부각시킴으로써 오크통 향과 높은 알콜 레벨 등의 여러가지 요소가 최적의 밸런스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
▶보르도(Riedel Bordeaux)- 보르도산 적포도주, 카버네 소비뇽과 멜로 등의 품종에 어울리는 와인잔은 이처럼 볼이 약간 길고 입구가 좁은 형의 잔에 마시는게 좋다. 너무 작은 잔에 마시면 씁쓸한 맛의 태닌이 강하게 부각될 수 있으므로, 부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큰잔에 마셔야한다. 넓게 퍼지지 않고 길쭉한 모양의 잔에 마심으로해서 한가지 과일향이 아닌 여러 겹의 과일향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례로 즐길 수 있다.
◀버건디(Riedel Burgundy)- 부르고뉴산 적포도주, 피노 누아 품종에 어울리는 와인잔은 볼의 아래쪽이 넓고 입구가 좁으면서 전체적으로 사이즈가 큰 잔으로 마시는게 좋다. 특히 이 와인잔으로 피노 누아를 마시면 와인이 혀의 중앙, 단맛을 느낄 수 있는 부분에 가장 먼저 닿도록 와인이 흐르는 방향이 조절되어 신맛보다 과일맛을 더 부각시킨다. 이 잔은 모든 와인잔 중 가장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잔으로, 바디는 풍부하지만 태닌이 적고 신맛이 강한 부르고뉴산 적포도주를 마시는데 가장 적합하다.
◀샤도네(Riedel Chardonnay)- 신맛이 덜하면서 바디가 풍부한 백포도주에 어울리는 잔으로, 샤블리 등의 샤도네를 마시기에 적합한 잔이다.
특별히 이 잔은 과일향과 신맛의 밸런스를 맞춰주는데 중점을 두어서 그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소비뇽 블랑(Riedel Sauvignon Blanc)- 가벼운 바디와 강한 신맛과 부케를 강조할 수 있는 잔으로, 소비뇽 블랑을 마시기에 적합하다.
볼이 약간 길쭉하면서 작아서 와인의 향을 너무 강하게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상큼한 와인의 맛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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