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하모니카 구자애
산등성이거나
고즈넉한 저녁이거나
바다 한 귀퉁이거나
가만히 귀를 대어보면
예잔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파도소리이거니
아니면 갈매기 소리거니 했지만
심해에 드리워져있는
어망에서 나는 소리인 것이다.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가냘프고
슬픈 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조개잡이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거나
가족위해 망망대해
고기잡이 나갔던 어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거나
운이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낚지 못한 어망이
잡히지 않는 희망, 허기진 한숨소리, 아련한 갈증들을
제 구멍구멍사이에
고기대신 가득 채워 넣던 것이다.
가끔씩 어느 구멍에선가
청아한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드문일이었기에
금방 해일 속에 묻히고 만다
내 목소리가 무겁다거나, 가녀리다거나, 음울한 것은
쉴새없이 뒤채이는
파도 속에서 쓸리고 깎여
기다림의 상처와 잔해들이
아물어 가는 소리인 것이다.
▲약력
64년 충남면천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수료
계간 <문학산책>시부문 신인상 수상
의왕여성문학회 회원
미주시문학회 회원
▲당선소감
본향에서 못다 챙겨온 정겨운 시간 때문에 구석구석 흘리고 온 그리움 때문에 지금도 가끔씩 자다말고 일어나서 운다. 눈물처럼 흘려도 흘려도 고이는 샘 있을까 늘상, 고이지 않는 물이 되고 싶었다.
비우고 또 비워내야 채워질 수 있다는 진리를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시는 나 자신을 파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나를 팔려면 열심히 갈고 닦아 신상품을 자꾸 생산해 내야 한다. 허나 이미 구제품이 되어 팔리지 않는 나 자신 때문에 한동안 숨이 막혔었다.
그런데 ‘당선’이란 소식이 다시 숨구멍을 트이게 했다. 얼만큼 더 부재하고 얼만큼 더 결핍해야 시원한 숨을 내 쉴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시가 없으면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폐업 위기에 처해있던 나를 다시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결핍이 다른 틈새로 새지않게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늘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신 한국에 계신 배준석 선생님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미국생활에 많이 힘들어 하는 남편에게도 이 당선소식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한다.
<가작> 자유 전자 II 박성춘
갈 바를 모르느냐
어쩌자고 괘도를 벗어나
방황하느냐.
또다시 혜란이네 전기밥솥 전기줄이나 타고
니크롬선이나 달구려느냐
술이 덜깬 전기공의 어리버리한 손놀림에
감전시켜 그의 몸에 묻히려느냐.
아니면 끝없는 전기줄 타고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느냐.
그러다 하늘에 계신 벼락이 니가 지나던
전봇대를 내리쳐 불꽃이 되려느냐.
이제 쉬어라!
너는 끝없는 자유의 터널속을 쉼없이 헤멘다.
부슬부슬 비내리는 어느 아침,
산소엄마와 수소아빠의 품에 안기어
길바닥에서 하수구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
참자유를 누리어라
어느 따스한 봄날
태양이 불러 올라가거든
동무들과 더불어
찬란한 무지개의 빛깔이 되어아
꿈이 되어라
▲약력
전라북도 남원출생
강원대 생물응용공학 중퇴
미국으로 이민
건물 청소업
▲당선소감
감사합니다.
자유전자 II는 10여년 전 한국에서 썼던 자유전자를 기억속에서 더듬으며 다시 써본 것입니다. 10여년전 일기장을 읽어 버렸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그 당시 그 시는 허무로 끝났습니다. 20대를 미국에서 이렇게 저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다시 써본 그 시는 결코 그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희망으로 30대를 시작 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뜻밖에 한국 일보 문예 공모에 가작으로 당선됐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한국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가작> 붕어빵 선미숙
실직한 김씨는 몸 안 가득 비린내 훑는
상주 버들못을, 낙원상가 가랑이로
옮겨 놓은 채 들여다본다
그곳은 어설픈 손놀림이 반죽하는
밀가루 속의 길, 지나치는 무관심으로 지워지고
붕어는 제 비늘을 벗어 살림망에 걸쳐놓는다
아가미를 닫은 철판이 몇 시간째
뒤척이고 싶어 할수록 더 어긋나기만 할때
남향 햇살 환하게 피다 진 보금자리
햇살은 차마 그 설움 비추지 못하다
한마디씩 오르내리는 찌울림에 반짝거린다
조금씩 멀리로 소문나는 물비린내,
낙원상가 가랑이로 다시 흐르고
누런 봉투 안으로 2치가 넘는 붕어
수십마리 여러차례 햇살 안부 물으며 낚아진다
자꾸만 크게 들리는 철퍽거리는 소리
이빨 자국 선명하게 등 돌렸던
사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맞물려 있는 고통의 순간
상처 위에도 펄떡이는 붕어들,
문득 말을 삼킨 김씨의 목젖 싱싱하다
■ 심사평
“우열 가리기 힘든 입상작…정진 기대”
천여편을 넘을 듯한 많은 응모작에 비해 출중한 작품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마지막까지 남은 비슷한 수준으로 우열을 가리기사 쉽지 않았다.
당선작 <하모니카>의 구자애씨는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서 딴분보다 안심하고 당선으로 밀 수 있었다.
결점이 있다면 구성이나 표현이 자꾸 산문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 시는 결국 노래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박성춘씨의 <자유전자 II>는 색다른 소재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시인이 되려면 이런 뱃장은 있어야 할 것이다. 시라는 것은 결국 소재나 표현 방식의 새로운 발견에 다름 아닐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선미숙씨의 <붕어빵>은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알차게 구성한 은유의 역량이 돋보인다. 좀 더 다듬기에 정성을 보였으면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승희씨의 <비닐 하우스>는 제왕 절개 수술을 대비한 비범한 전개가 뛰어난다. 그러나 너무쉽게 고른 시어들이 피로감으로 온다. 형용사는 되도록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런면에서 유명숙씨의 <찐 감자가 웃을때>는 뛰어난 소재와 직관적 관찰을 너무 산만하게 늘어놓아서 시적 긴장감을 반감시키고 있다. 작은 골을 깊이 파는 연습을 권하고 싶다.
끝까지 당선작과도 비교되었던 N.Y의 황민하, 장진순, 수지 강, 김이영, CA의 문홍범, 시카고의 정연순씨, MA의 박이숙등의 분발을 기대해 보고 싶다.
‘하모니카’이미지 개연성 돋보여
박성춘의 <자유전자>는 다소 거친 문장이 흠이지만 전기를 통해 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신선했다. 선미숙의 <붕어빵>은 낙원 상가 아래를 지나다 우연히 보게된 붕어빵 장수를 통해 상처를 드러내는 방법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두분은 결국 구자애의 <하모니카>에게 당선자리를 내주었다.
유년 시절의 아픔과 쓸쓸함을 몸으로 직접 울어내는 소리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개연성도 좋았고, 무엇보다 함께 투고해 준 작품들이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어 선자들의 믿음을 샀다. 그밖에 장려상으로 한승희는 자신의 몸을 <비닐하우스>로 전환시킨 점에서 여성성이 물씬 느켜지나, 함께 투고한 작품들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유명숙의 <찐 감자가 웃을 때>는 다소 어수선하게 느껴지나, 시에 있어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좋은 보기가 될 것 같다. 수상자 전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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