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 연휴에 언니와 함께 애틀란타에 다녀왔다. 2박3일 쉽지 않은 여정을 낸 것은 그곳에 살고 계신 큰고모님과 고모부님, 고종사촌 오빠, 언니 가족들을 찾아뵙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 연휴동안 남편과 아들이 보이스카웃 캠핑을 떠나게 되어 부담 없었고, 언니는 가게를 동생과 딸아이에게 맡겨놓고 어려운 걸음을 하였다.
큰고모님 가족과는 한국서 살 때도 내왕이 잦지 않아 가깝게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에 온 후엔 더욱 연락이 뜸했다. 15년전 나의 결혼식때 잠깐 다녀가셨는데 나는 그때 정신이 없어 거의 기억도 나지 않고, 그 이후 통 뵙지를 못했다. 얼마전 소식을 들으니 연세가 85세인 고모님은 허리를 쓰지 못해 거동이 힘드시다고 했고, 86세인 고모부님은 치매기가 있어서 양로병원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싸아해지면서 몇 년안에 부음을 듣겠구나 싶었다. 그러면 그때 가뵈야 할까, 조의금만 보내도 될까 생각하다가, 도대체 가신 후에 찾아뵙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지면서 언니와 이야기를 했다. 같은 미국에 살고 있는데, 찾아뵐 수 있을 때, 정신이 온전하실 때 뵙고 인사를 드리자고. 비즈니스에 매여 통 여행을 하지 않는 언니였지만 나보다 두분에 대한 기억이 훨씬 많고 가깝게 지냈던 언니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렇게 먼길을 날아가 일부러 뵐 생각이 들었던건 큰고모님 정준희 여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느 분보다 고모님을 무서워했다. 항상 엄격하고 치우침 없이 곧바른 성품에 끊임없이 경우와 법도, 예의범절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식탁에 팔꿈치 올려놓지 말아라, 수저 함께 쥐고 먹지 말아라, 어른 앞에서 다리 꼬고 앉지 말아라, 옷 입은게 그게 뭐냐, 신발은 가지런히 벗어두어라, 문 닫을 때 소리 내지 말아라, 그건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어릴 때 고모댁에 놀러가면 우리는 주눅이 들고 불편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잔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고모님에게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품위가 있어서 어렵기만 했다.
할아버지의 대쪽같이 강직한 성품을 혼자 닮으셨던 고모님은 일제시대에 이화여전을 나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셨는데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사업하는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대를 피하느라 결혼하신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했고 평범한 주부로 일생을 사셨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남자고 여자고 그렇게 한결같이 똑바르신 ‘어른’을 찾아보지 못했다.
그 고모님께서 노인 아파트에 앉아 계셨다. 자녀들이 앞다퉈 모시겠다고 수도 없이 권유하고, ‘납치사건’까지 벌였건만 절대 자식 신세지기 싫다고 혼자 사신다고 했다. 여자로는 키가 크신 편이었는데 척추를 앓으면서 내려앉아 작아지신 모습이 가슴 아팠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며 총기는 여전하셨지만 과거 엄하게 느껴졌던 얼굴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양로병원에 계신 고모부님은 우리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셨다. 건축가로 활약하시며 연세대학교 건물도 여러 동 지으셨던 고모부 김한성 사장님. 항상 나비 넥타이에 베레모나 중절모를 쓰고 지프차를 몰고 다니셨던 멋쟁이 신사였다. 세월의 무상함과 나고, 늙고, 병들고, 돌아가는 인생의 사이클을 느끼며 눈물이 쏟아졌다. 나의 노년이라고 이에서 얼마나 다를 것인가.
2박3일동안 옛날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모님을 통해 듣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친척 친지들의 이야기 중에는 우리가 전혀 모르던 사실들도 많아 신기하기만 했다. 고모님의 놀라운 기억력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평생 겪으신 모든 사건에 대하여 연도와 사람 이름 하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니, 벌써부터 건망증과 기억력 감퇴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고종사촌오빠 두분과 언니 한 분은 가족 모두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살고 계셨다. 처음 가본 애틀란타에서 환대받고 지낸 사흘은 꿈 같았다. 남부 음식을 먹어보라고 해서 돼지고기 바비큐와 브런스윅 스튜, 스윗티를 먹기도 했고 폭포 구경하러 산에 올라가 울창한 나무 구경도 실컷 했다.
“와줘서 고맙다. 내가 이제 살아서는 너희들을 또 못 보겠구나” 고모님과 헤어지면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지만 이제라도 사람 도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은 가벼웠다.
또한 달랑 우리 세자매만 사는 줄 알았던 미국땅 저 동쪽에 우리와 피로 맺어진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음을 눈으로 보고 온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수확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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