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말을 남긴다. 대통령은 그 어록으로 기억된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의 말은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그 말을 한 본인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오래 살아 남는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그렇다. 민주주의의 요체를 가장 간명하게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 이 연설문은 오늘날에는 중학생들도 다 알 정도다.
루즈벨트의 어록도 유명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밖에 없다’- 대공황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연설구절이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묻지 말라’는 케네디의 연설, 공산주의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서슴없이 묘사한 레이건의 말도 아마 길이 기억될 것이다.
오래 기억되는 대통령의 말들은 대체로 용기와 희망과 위안을 주는 메시지들이다. 그 표현 방식은 간결하지만 장중하고 웅혼하다. 기품이 있고 또 때로는 현란한 수사도 동원된다.
그 말이 오래 기억되고 울림이 큰 것은 그렇지만 수사나 기교 때문만이 아니다. 시대의 맥을 짚고 희망과 비전과 목표를 제시해서다. 확고한 통치철학을 바탕으로 전해진 메시지인 까닭에 혼(魂)이 있고 감동을 준다.
말의 메시지를 지배하는 건 화자(話者)의 역할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양지차라는 이야기다.
성경 말씀을 예로 보자. “나는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화자가 예수님이므로 복음이다. 그 화자가 이웃의 보통 사람이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한다.
한 미국의 언어학자는 대통령이 사용하는 독특한 화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존중하는 낙천적 화법을 구사하고 구체적이고 단순한 단어로 쉽게 이야기하고 저속하고 과격한 단어는 절대로 피한다는 것이다.
많은 미국의 대통령들은 후보시절에 즐겨 쓰던 표현을 당선된 후에는 쓰지 않는다. 최종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자각한 때문이다. 입장이 그러하므로 말 한마디가 자칫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항상 긍정적이고 힘을 주는 화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가지가 더 있다. 결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이 지니는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동양의 제왕학(帝王學)에서도 기본 과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일화로 이런 게 있다.
김상량이란 사람은 음직으로 지사벼슬에 이르렀다. 망(望)에 올랐지만 오래도록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지 못하다가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황주목사로 낙점됐다. 그래서 입시했다. 임금은 성명을 묻고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낙점을 했던 것이다. 임금은 그러나 임명을 철회하지 않고 나가서 일을 잘 보라고 했다. 그 임금은 영조다.
이규상의 ‘병서재언록’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일화의 포인트는 최고 권력자의 말이 지닌 무게에 있다. 실수로 한 말이라도 최고 권력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한 대통령학 전문가는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대통령은 한 문장으로 요약돼 기억된다.” 동서냉전에서 승리했다. 레이건이다. 노예를 해방시켰다. 링컨이다.
공산 전체주의는 반(反)인간적 체제라는 확고한 신념이 없었으면 냉전의 승리는 불가능했다. 연방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노예해방의 결과를 가져왔다. 한 문장으로 기억된다는 건 시대의 흐름을 내다보면서 신념의 정치를 폈다는 의미도 된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발언이 계속 논란을 빚고 있다. ‘깽판’ ‘양아치’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죠‘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 ‘개판’…. 비속어의 남발에 할 말 안 할 말이 마구 튀어나와서다.
노 대통령이 후보시절과 취임 이후 발언해 논란을 빚고 있는 비속어는 손꼽기 어려울 정도다. 보도에 따르면 그러나 이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인데 말의 텍스트와 주인이 얼른 연결되지 않는 표현이 하나 둘이 아니다. 대통령의 언행인지 시정배의 말인지 구별이 안 간다는 말이다. 게다가 말 바꾸기도 예사인 모양이다.
“이름을 바로 쓰지 않으면 말이 순리대로 통하지 않고 말이 순조롭게 통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성사될 수 없다.” 공자님의 말씀이다. 할 말과 안 할 말이 구별하지 않고 마구 쓰여지는 상황, 이는 언란(言亂)으로, 이게 바로 잡아지지 않을 때 대란(大亂)이 올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그 경고는 이미 현실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인사대란에, 물류대란에, 교육대란에, 안보대란이 겹쳐 하는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세에 어떤 어록으로 기억될 것인지….
옥 세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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