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을 알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 방법은 거북이 등을 불에 구워 나타난 모양을 판독하는 것부터 철새가 날아가는 형상이나 양의 창자 모양을 연구하는 것까지 다양했지만 하늘에 앞날을 묻는 것은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 공통의 현상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도 정초가 되면 수많은 한국인들은 운명 철학관을 찾는다.
여러 점 집 중 서양에서 가장 소문난 곳은 그리스 델피에 있는 아폴로의 신탁이다. 새파란 코린트 만을 굽어보는 파르나서스 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는 이 신탁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기원 전 1400년부터 기원 381년까지 문전 성시를 이뤘다.
델피의 신탁은 애매 모호한 것이 특색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리디아의 왕 크뢰서스에 관한 것이다. 처음 동전을 발명, 거만의 부를 쌓은 크뢰서스는 이웃 부자 나라 페르샤가 탐이 났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인만큼 신중을 기하기 위해 후한 사례금과 함께 ‘전쟁을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었다. “페르샤를 공격하면 큰 나라가 망할 것이다”란 대답이 왔다.
크뢰서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진군 나팔을 불었다. 그러나 결과는 리디아의 참패였다. 크뢰서스 왕은 포로로 잡혀 처형당할 운명에 놓이게 됐다. 사람을 보내 “아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예언은 적중했다”는 전갈이 왔다. 전쟁을 해 리디아라는 큰 나라가 망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자고로 예언은 딱 부러지게 하는 것보다 두루뭉실 하게 하는 것이 오래 간다. 현재 미국에서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게 얘기하는 것으로 정평이 있는 사람으로 앨런 그린스팬 연방 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들 수 있다. 월가의 굵직굵직한 기업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고추 세우고 있지만 정작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발언의 애매 모호함이 델피의 신탁을 뺨치기 때문이다. 너무 속을 내보여 구설수에 자주 오르는 노무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
그런 그린스팬이 최근 비교적 알기 쉬운 말을 했다. “반갑지 않은 인플레의 큰 폭 하락 가능성은 작지만 인플레의 가속화보다는 가능성이 크다”는 성명이 그것이다. ‘반갑지 않은 인플레의 큰 폭 하락’은 통역하면 디플레이션이다.
한 때는 “벼락 맞아 죽을 가능성보다 적다”던 디플레가 이제는 FRB가 위험을 경고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언론에도 디플레에 관한 기사가 현저히 늘고 있다. 2000년까지 만도 인플에 관한 기사가 디플레보다 32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2001년에는 12배, 2002년에는 5배, 올해는 3배로 줄어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디플레가 인플레를 앞지르지 말란 보장도 없게 생겼다.
물가가 내려가면 좋은 점도 있지만 부작용이 더 크다. 기업은 안 팔리는 물건을 팔기 위해 가격을 더 내려야 한다. 소비자들은 더 값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그 와중에 기업은 도산하고 직원들은 해고되거나 감봉 당하며 이로 인해 구매력은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기다리면 물건값이 내린다”는 의식이 소비자들의 머리에 한번 박히면 이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FRB가 애써 ‘디플레’란 말을 피한 것도 그 단어가 주는 심리적 효과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 십 년 간 FRB의 최대 적은 인플레였다. 한인과 미국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물가가 장기간 하락하는 디플레를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193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역사를 보면 인플레와 디플레가 주기적으로 순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1840~50년대와 1890년대에는 오랜 기간 물가가 하락세를 거듭했다.
인플레를 잡는 처방은 잘 알려져 있다. 돈의 가치인 금리를 인플레 율보다 높게 책정하는 것이다. 디플레를 잡는 것은 이보다 어렵다. 금리를 0% 이하로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 중앙 은행은 사실 상 금리를 0% 선으로 유지하고 있음에도 10여 년째 내려가고 있는 물가를 잡지 못하고 있다.
디플레는 전반적으로 경기를 위축시키지만 실질 금리를 높이기 때문에 빚이 많은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과연 디플레가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미리미리 부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둬서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다.
민 경 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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