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은 아침이었다.
요즘 자주 잊어버리고 학교에 가버리는 작은 손녀딸 대신 국기 게양대에 국기를 올렸다. 9.11 이후, 나의 사위는 손녀와 주 1달러에 매일 국기를 게양하고 또 내리는 계약을 맺었다. 자기가 사용했던 식기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침대를 정리하고 주급 4달러씩 받던 것이 이제는 5달러가 된 셈이다. 국기 게양을 계속 도와야 한다면 1달러 중 30센트는 내가 돌려 받아야 할까 보다.
20피트 높이의 푯대에 매달린 성조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이라크 전쟁에 나가 있는 우리 군병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했다. 그들의 가족들도 생각해 보았다. 노랑 리번을 사 와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전쟁은 종전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맙고 잘된 일이었다.
뒷짐을 지고 집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의사가 건강을 위해서 많이 걸으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수목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눠야 했다. 나무들은 내가 왜 유독 저희들을 선택해서 내 뜰로 데려왔는지를 나무마다의 사연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도 연두색 꽃잎이었던 산수국이 하얗고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산수국이 피면 나는 못 견디게 나의 큰 시누님이 그리워지곤 한다. 오래 전 일이다. 누님과 나는 성북동 산골짜기의 가늘게 흐르는 개울물에 자질구레한 빨래를 담그고 있었다. 나의 첫딸 미란이의 기저귀도 들어 있었다.
그때 누님과 나는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작은 새 한 마리가 누님과 내 귓바퀴에다 대고 잰 소리로 ‘삘리삘릴리이’ 지저귀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두 사람을 에워싸듯 주위에 피어 있는 탐스러운 산수국을 보았다. 정이 많은 누님은 슬하에 자녀가 없으신 탓으로 유별나게 나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았다. 고모가 조카들을 사랑해야 무탈하게 잘 자란다 하시며. 인걸은 간데 없다더니… 산수국은 올해도 활짝 피어났다.
소가 여물을 반추하듯 문뜩 문뜩 옛일을 떠올리며 뜰 입구에 놓여진 신문을 주워들었다. 신문을 비닐봉지에서 꺼내 벤치에 올려놓고 나는 이슬을 마시려고 혀를 한 뼘(?)이나 내밀고 나뭇잎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딸기 따듯이 살짝 비틀어 잡아 비닐봉지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달팽이를 질식시키는 것이 좀 잔인하기는 해도 뒷마무리가 깨끗해서 좋다.
늙은 살구나무 가지에 야들야들한 떡잎이 퍼졌다. 살구열매가 듬성듬성 보인다. 올해도 살구술을 담글 수 있을까. 작년에는 살구가 풍년이 들어 두어 됫박이나 되는 파란 살구를 주워서 ‘보드카’를 넣고 살구술을 담갔다.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엊그제 써니 내외가 왔을 때 ‘아, 그것’ 하고 생각이 나서 한해나 묵은 술항아리의 마개를 뽑았다. 술을 떠서 한 잔씩 권하며 ‘어때요?’하고 물었다. 아주 맛있다고 했다.
두 내외는 1년 전에 신혼부부처럼 짐을 다 챙겨 가지고 오래 살던 내 이웃동네에서 두어 시간 남짓이나 떨어진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요근래 그 집을 되팔았다는 것이다.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이유였다. 나는 그 날 두 사람에게 살구술을 권하며 “그러니까 왜 그렇게 먼 데로 갔어? 우리가 한국마켓에 가서 사지 않아도 참외나 미나리를 보기만 해도 위로 받는 것 몰랐어? 설령 고약한 한국 친구가 있어 차라리 저런 사람은 옆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낫다고 여길 때가 있어도 사실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야. 정신위생상으로도”라고 했다.
올해는 힘이 부쳐서 사람을 사서 새로 옥수수 밭을 일구어 묘종을 심었다. 100여그루를 문득문득 떠오르는 향수와 같이 심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한대 한대 심으며 아직도 그리워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지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몇해 전만 해도 이 텃밭에서 나는 구덩이를 파고 어머니는 옥수수씨를 뿌렸는데… 옥수수를 좋아하면서도 이에 끼이는 껍질이 싫다고 나에게 다 먹으라고 했던 남편도 생각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데도 일부러 일찍 심어놓은 옥수수가 익지를 않아 물알이 튀는 옥수수라도 쪄서 먹여서 신의주로 보내야 한다시던 내 외조모도 생각하였다.
내력일까. 나의 서양사위마저도 옥수수를 무척 좋아해서 해마다 나는 옥수수 밭에 유난히 신경을 쓴다. 지난해에 나의 집 아래쪽에 새로 이사온 한국분 내외에게 가끔 과실나무도 나누어주며 정을 주고받는데 엊그제 들른 두 내외에게 옥수수 밭을 또 자랑하며 “하 선생, 설마 오밤중에 올라와서 내 옥수수 서리해 가는 것 아니겠지?” 했다. 세 사람은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크게 웃었다.
김상용의 대표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두번째 연에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려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와 자셔도 좋소./ 셋째 연에는 … 왜 사냐건/ 웃지요./ 라고 했는데 그렇지, 딸도 사위도 손자들도 이웃도 문우들도 함께 와 자실 수 있도록 정으로 이 밭을 가꿀 것이야.
왜 이렇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느냐고 누군가가 묻거들랑 나도 아무 말 말고 김 시인처럼 비죽이 웃을 것이다. 웃음처럼 좋은 대답이 또 있겠는가.
정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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