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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1259년 영토 내에 라틴 세력을 몰아내고, 다시 동로마 황제에 오른 미카엘 8세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는 시칠리아와 오스만 투르크를 견제하는 일이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풍전등화였다. 그때 미카엘 8세는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자니 그리스정교의 교리를 포기하고, 로마 교구의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여야 했다.
중세에는 종교 교리가 목숨과도 같이 소중했고, 동로마 황제가 교황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교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나라가 살자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카엘 8세는 정교회 대표를 로마에 보내 교황의 교리를 받아들일 것이니 도와달라고 청원했다. 명색이 로마 황제인 그로선 비굴하기 짝이 없은 일이었고, 그는 사후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장례를 거부할 정도로 반발을 샀다. 하지만 그는 교황의 지원을 얻어 콘스탄티노플 성채만 남은 도시 국가를 살려냈다. 그후 동로마는 숱한 외적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아 200년의 국가 운명을 이어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통치자가 때론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더라도 국가 이익을 위해 외교 관계에서 몇 발자국 물러설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한 발언을 놓고, 한국 사람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12일 코리아소사이어티 행사에 참석한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이 당당하게 나올줄 알았는데, 너무 비굴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서운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네티즌들 사이에 “노 대통령이 그럴 줄 몰랐다”, “부끄럽다”는 부정적 반응과 “국가 이익을 위한 전략적 발언”이라는 긍정적 이해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선거운동 기간에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며 반미주의자로 인식됐던 그가 미국에 와서 “53년전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바뀌었다. 극단론자들은 ‘굴욕외교’라느니, ‘사대외교’라느니 하면
서 비판의 칼을 세우지만, 노 대통령의 방미를 가슴졸이며 지켜보던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두쪽 다 맞는 말이다. 내 나라 대통령이 강대국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대처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국제사회를 협박하고, 이에 겁먹은 해외투자자들이 한국을 불안하게 보고 투자를 안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국가 원수가 한발 물러서는 것도 대단한 용기다. 게다가 외국 땅을 방문하면서 그나라를 칭찬하는 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닌가.
지난해 말 촛불 시위로 번진 반미 감정으로 어느 때보다 금이 간 한미 동맹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대통령이 그 정도의 수사를 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줄 수 있질 않는가. 그런 노력 덕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약속했고, 노 대통령을 “대화하기에 편안한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우며 정상간 우의를 확인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치욕과 굴욕을 감내해야 했던 순간들이 많이 발견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의 사타구니까지 기어들어가고, 겨울에 오다 노부가나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듯하게 해준 덕분에 최고의 지위에 올라 일본을 통일했다.
병자호란때 인조 대왕이 오랑캐 군주에게 머리에 피가 흥건하도록 절을 하고 오줌 세례를 받는 치욕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수만명의 인명을 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유지했다면 그에게 무작정 돌을 던질 수 만은 없다.
한번도 주권을 잃은 적이 없는 몽고를 내지화한 청나라가 조선의 주권을 인정한 것은 한민족이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민족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양대 임계순 교수가 설명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의 방미 발언을 굴욕이니, 치욕이라며 무책임하게 비난하는 행위가 오히려 비굴한 행동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 대통령의 외교적 발언에 시비 걸게 아니라, 한국의 국력이 지금보다 10배 이상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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