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
한국에 나가있는 시누이로부터 지난 주 전화가 왔다. 우리 은행구좌로 돈을 얼마간 부쳤으니 어머니께 전해달라는 전화였다. 어머니날이던 지난 일요일, 우리도 카드에 돈을 넣어 어머님께 드리고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러하듯 일년에 세 번-어머니날, 생신, 크리스마스때는 시어머니께 책 같은 작은 선물과 함께 카드에 돈을 넣어 드린다. 결혼 초창기에는 이것저것 선물을 사다 드리기도 했지만 돈이 가장 좋은 선물임을 서로 다 알게 됐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하고 있다.
어머님도 무슨 때면 우리에게 돈을 주신다. 주로 손자의 생일, 졸업, 어린이날, 설날, 크리스마스, 뭐 꼭 굳이 그런 때가 아니어도 손자 핑계를 대시면서 돈을 쥐어주시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들은 그 돈을 모두 나에게 가져왔는데 올해부터 그런 일이 없어진 것이 좀 아쉽기는 하다.
남편과 나도 무슨 때면 돈을 주고받는다. 서로의 생일,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이면 카드에 닭살 돋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쓴 후 돈을 넣어 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같은 액수의 돈이 같은 호주머니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인데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것은 그 돈이 ‘눈먼 돈’ 이기 때문이다.
한국서는 식구도 많고 친척도 있고 엄마에게 말만 잘 하면 얼마씩 타낼 수가 있었기에 눈먼 돈의 기쁨을 잘 몰랐는데 미국생활이 각박하다고 하는 이유중엔 분명히 어디서도 생기지 않는 눈먼 돈의 아쉬움이 끼여있으리라.
언니도 나에게 돈을 준다. 미국에 온 첫해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중년이 된 동생의 생일에 언니는 선물이라고 돈을 주고 있다. 어쩌다 생일날짜를 잊고 지나갔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마치 계산해야할 채무관계처럼 반드시 불러서 돈을 주곤 한다. 나의 아들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도 언니는 마찬가지다.
올해 어머니날 아침, 나는 3년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가슴 아픈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한번도 친정어머니께 돈을 드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번도...
의사로서 돈을 많이 버셨던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주시는 분이었지, 드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나보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내가 어머니께 보낼 수 있는 액수라는게 어머니가 버시는 돈과는 쨉수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아예 어머니는 돈이 필요치 않은 분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 것은 액수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사실을 왜 나는 미처 몰랐을까? 부모가 아무리 부자여도 자식에게 받는 작은 용돈이나 선물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의 어머니에게는 적용하지 못했을까? 내가 한번이라도 돈을 부쳐드렸더라면 어머니는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나의 다른 형제들이 어머니께 돈을 드린 적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결혼하고서 시부모님께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챙겨드렸던 일을, 멀리 떨어져 자주 뵙지 못했던 친정 어머니께는 왜 할 생각조차 안 했었는지, 왜 그런 일들이 지금에서나 깨달아지는지, 내가 안하면 왜 남편이라도 챙기지 않았는지, 한없이 가슴이 저미고 아파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물네살, 철이 들만큼 든 나이에 미국에 왔으면서도 나는 어머니날이나 생신때 돈은커녕 선물을 보낸 일도 없었다. 처음 몇해동안은 그리움에 카드를 보냈던 생각이 나지만 결혼하고 난 후엔 때맞춰 안부 전화나 제대로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이곳에 다녀가셨을 때에도 내가 돈을 드릴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오로지 엄마가 쓰다가 남겨두고 가실 돈에만 관심을 가졌던 나쁜 딸이었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가 되었으면서 이런 일들은 왜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서나 깨달아지는 것일까.
아직도 철없고 이기적인 나는, 한평생 주시기만 하던 어머니에게 좋은 딸이 못 되었고, 지금은 외로운 시어머님께 좋은 며느리가 못 되며, 엄마를 유난히 밝히는 나의 아들에게도 좋은 어머니가 못 된다는 자책감이, 하루종일 깊이깊이 나를 괴롭히던 어머니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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