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특집
▶ 최초 미 유학생은 조선 사절단 ‘보빙사’ 종사들’
2003년은 한인 미주 이민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조선과 미국이 국교를 트고 조선 공직자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지 120년이 되는 또 다른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조선은 1882년 체결된 한미우호통상조약에 의해 부임한 미국 공사 루시어스 H 푸트의 요청으로 이듬해인 1883년 7월 미군함 Monocacy호로 견학 사절단인 ‘조선 보빙사(朝鮮 報聘使)’를 파견했다.민영익 전권대신, 홍영식 부대신, 서광범 종사원, 유길준, 변수, 최경석, 현홍택, 고영철과 5명의 수행원 등으로 구성된 조선 보빙사는 미군함으로 일본에 온 뒤 상선 Arabic호를 갈아타고 9월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다.
이들은 개통된 지 12년이 넘은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시카고를 경유 9월15일 워싱턴D.C.에 도착해 미국 정부의 손님으로 알링턴 호텔에 투숙했다.
이들은 때마침 뉴욕에 체류중이던 체스터 A 아더 21대 미대통령과 프레드릭 T 프레링휘센 국무장관을 만나 위해 17일 뉴욕으로 출발, 아더 대통령이 머물던 5번가 호텔(Fifth Ave Hotel)에 투숙했다.
일행은 다음날인 18일 5번가 호텔에서 아더 대통령을 만났고 고종의 국서와 신임장을 제출했다. 이날 오후에는 센트럴 팍을 관광했고 5시30분발 브리스톨호(Bristol)를 이용, 보스턴으로 향했다. 이들은 이후 약 2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며 주로 뉴욕, 보스턴, 워싱턴D.C. 세 지역에서 농업, 교육, 섬유공업 시설과 의료, 우편 등 공공시설을 시찰한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1882년 채결된 미수호통상 조약 인준 이후 하와이 이민 시작 전까지 유학 또는 망명 명목으로 약 50명의 조선인이 미국을 다녀갔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인준된 1883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미국에 들어온 학생 수는 모두 891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를 연대별로 분류해보면 우선 1883년부터 하와이 이민 이전 해인 1902년 사이에는 망명 또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민영익 대신의 허락을 받아 미국에 남은 유길준 박사를 비롯, 변수, 박에스터 (김점동), 서광범, 박영호, 서재필, 김규식, 백상규, 안창호, 윤치호 등 20명 정도가 미주에 왔다.
1903년부터 1910년 한일 합방 때까지는 리강, 신흥우, 박용만, 리승만, 오긍선 박사를 비롯해 약 54명이 미국에 유학왔다. 1911년과 1918년 사이에는 망명 출국하여 여권 없이 미국에 도착한 학생이 541명이나 됐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에는 289명이 조선총독부 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 이들중 2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미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통·역과 번역의 요직에 채용돼 미군에 복무하거나 광복 이후 미군정을 따라 귀국 또는 미국에 영주하게 된 사람도 있다.
해방 후 45년부터 56년까지 미국에 유학온 한인 수는 3,800명을 넘었고 53년부터 67년까지 문교부 유학 자격 시험을 거쳐 미국에 유학온 학생 수가 6,845명으로 그 중 80% 이상이 학업을 마치고 미국에 취업 영주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인 이민의 시작은 1903년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노동 이민부터이고 이들은 그 이전이나 이후 유학 또는 망명의 목적으로 미국에 온 한인들과는 다른 역사를 지닌다.
<김휘경 기자>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1856-1914)

보빙사 종사로 왔던 27세의 유길준은 민영익 대신의 허락을 받아 미국에 남아 생물학자 에드워드 S 모스로부터 영어와 과학 개인 지도를 받은 후 1884년 9월28일 메릴랜드 바이필드(byfield)소재 Governor Dummer Academy 3학년에 편입했다.
유길준 박사는 이미 1881년 신사 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남아서 게이요 의숙에 입학해 1년 반동안 공부해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15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갑신정변의 기사를 읽고 학업을 중단하고 다음해 1885년 말 유럽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개화파라는 이유로 7년간 유폐 생활을 하게 됐으며 그때 서유견문 20편을 저술했다. 그는 저서에서 과학기술 육성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13편으로 구성된 서양 학문 소개에서 새로운 증기, 전기, 기계의 성행 시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국가의 부강이 이런 과학기술에 좌우된다고 강조했다.
1894년 갑오경장에 참가했다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하자 다시 일본으로 탈출했다. 1896년부터 11년 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국민 계몽 사업을 벌리고 교육 운동에 주력했다. 한국 최초의 국어 문법책인 대한문전을 간행하기도 한 선구자다. 그는 일본 망명 중 기독교에 귀의하였으며 1914년 5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최초의 뉴욕주 유학생 김점동(1876-1910)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90년 선교 여의사 로세타 쉐우드 홀의 통역관겸 특별 조수로 일했다. 쉐우드 홀 박사가 결혼하자 부부를 따라 평양으로 옮겼고 그들의 주선으로 박여선(혹은 박유산)과 결혼했다.
남편의 갑작스레 사망하자 쉐우드 홀 부부를 따라 미국으로 오게된 김점동 박사는 1895년 2월 뉴욕주 리버티의 공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년반 후 1896년 10월 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해 1900년 6월 한국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4년제 의과대학 졸업 의학사가 되었다. 그는 1910년 4월 폐결핵으로 3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최초의 이학사 변수(1861-1891)
변수는 1882년 3월부터 개화파인 김옥균, 서광범, 강위 등과 일본에서 화학과 양잠술을 공부했고 제물포 조약 후 박영효 정사를 수행해 김옥균, 민영익, 서광범 등과 도일 차관 교섭 요원으로 일했다.
1883년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채용돼 민영익 전권대신과 세계 일주를 하고 귀국한 변수는 이후 갑신정변에 참가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민영익 대신이 홍콩은행에 맡겨놓은 거액의 돈을 훔쳐 일본에서 망명처를 찾고 있던 중국 유학생 민주호, 윤정식을 만난후 신문학을 배우고 싶어 이들과 함께 도피처로 1886년 1월 미국으로 온다.
그는 워싱턴시에 있는 벨리츠 어학학원에 입학, 영어 공부를 하고 1년반 후 1887년 9월 메릴랜드 농과대학(현 메릴랜드 주립대의 전신)에 입학한다. 4년 뒤 1891년 6월 변수는 미국인 학생 4명과 함께 졸업함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B.S. 학위를 받은 사람이 됐다.
농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귀국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졸업 후 미국 농무성에서 촉탁(consultant) 자리를 얻어 일본의 농업에 관한 통계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의 졸업논문 및 연구보고서는 당시 미국농무성 차관이었던 윌리츠에게서 극찬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어 중국의 농업에 관한 연구 계약을 맺고 준비하던 중 1891년 10월22일 College Park 기차역에서 기차에 치어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1891년 10월23일자 신문에 그의 사망기사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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