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최대 은행인 한미에서 행장이 ‘뒤끝이 좋지 않게’ 나간 것은 이번이 아니다. 전임자인 민수봉 행장은 임기 몇 개월을 남겨 놓고 윌셔 은행으로 ‘야반도주’했고 그 전임자인 벤자민 홍 행장은 지금도 한미 은행 이사라면 이를 갈고 있다. 한미 이사들에 대한 ‘한’이 나라 은행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전임자들보다는 성격이 온순한 것으로 정평이 있는 육 행장마저 사퇴한 것을 놓고 “이사회의 등쌀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육 행장의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그 동안 30년 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지쳐 한국에 나가 교편도 잡고 여행도 하고 싶다”는 것이지만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은행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바꿀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개월 간 한미의 상대적 부진과 은행 경영 방침을 둘러싼 이사들과의 갈등이 진짜 원인이라는 게 정설이다.
행장과 이사회와의 다툼은 한미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80년대 후반 중앙 은행에서는 찰스 김 행장 연임 문제를 놓고 행장과 이사회가 정면 충돌, 행장 측근인 은행 직원 10여명이 집단 사표를 낸 일도 있었다. 결국 행장과 이사회의 ‘권력 투쟁’은 이사회의 승리로 끝나 김 행장이 한인 은행계를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됐지만 그 앙금은 오래 동안 남아 중앙 은행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었다.
나라 은행의 전신인 미주 은행도 행장 인선을 둘러싼 이사들 간의 대립으로 문 닫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역설적이지만 그 덕에 나라는 현재 한인 은행 중 행장과 이사들 간에 말썽이 가장 없는 곳으로 꼽힌다. 벤자민 홍 행장이 들어가 혁혁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이론이 없고 대주주인 토머스 정씨 등이 은행 업무를 잘 모르는 데다 그 동안 주가가 수십 배 씩 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승훈 신임 행장이 취임한 이 후에도 행장의 독립적인 책임 경영이 이뤄질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리틀 홍’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상왕 노릇을 하려 한다”는 타운의 우려를 어떻게 불식시키느냐가 이사장 직을 맡게 될 벤자민 홍 행장의 큰 과제다.
윌셔 은행도 행장과 이사간의 말썽이 적은 편이다. 10명의 이사 중 절반이 미국인이어서 한인 은행 업무에 관여를 할래야 하기 힘들고 고석화 이사장이 전체 주식의 1/3을 쥔 대주주여서 다른 이사들은 별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고 이사장과의 관계만 원만하면 윌셔 은행장 하기는 비교적 쉬운 셈이다. 민수봉 행장 취임 후 4년 간 은행 규모가 4배가 늘어나는 등 급성장을 했다는 점도 행장과 이사회 사이가 좋은 이유의 하나다.
여러 한인 은행 중 한미에서 유독 행장과 이사들 간에 갈등이 심한 이유는 한미 이사들에게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한미의 구조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한미 은행은 로컬 은행으로는 한인타운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가장 규모가 크다. 이 은행 이사들은 대부분 1982년 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은행 업무에 관여해 온 사람들이다. “자본금 수백만 달러로 시작한 이 은행을 자산 규모 15억 달러로 키운 것은 우리 공이며 은행 일이라면 우리가 행장보다 더 잘 안다”는 자부심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여러 이사 중 한 사람이 대다수 지분을 갖지 못하고 5% 정도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이사 간 의견 통일을 어렵게 한다. 이사장 직도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행장을 제외한 10명 이사 중 과반수가 전 현직 이사장이다. 지난 번 이사장 선출 때는 노광길 전 이사장이 여러 차례 이사장 직을 지냈으면서도 한번 더 하려 해 박창규 현 이사장과 치열한 표 대결을 벌여야 했다는 후문이다. 어떤 사람이 행장을 하더라도 ‘에고’와 ‘자부심’이 강한 이들 이사들의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정현 씨가 10년 이상 이사장 직을 맡아 다른 이사의 ‘도전’이 없는 중앙 은행과는 대조적이다.
한미 은행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이사들의 머리 속에 ‘우리가 키웠지 월급쟁이에 불과한 행장이 한 게 뭐 있어’라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겉으로 뭐라 해도 행장을 금융 전문인으로 우대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한미 이사들의 행장에 대한 푸대접은 한인 금융계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벤자민 홍 행장 시절 한미 이사장이 공개석 상에서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자기 위인 행장을 큰 소리로 면박을 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홍 행장이 그런 대접을 받았으면 다른 행장들은 오죽 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역시 한미은행장을 지낸 또 다른 인사도 “한번은 병석에 누워 있는데 은행 이사가 찾아와 욕설을 하고 갔다”며 “‘은행 발전을 위해 힘쓴 죄밖에 없는 데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한미 은행은 이사들이 은행돈을 헤프게 쓴다는 이유 등으로 94년부터 5년 간 관계 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적도 있다.
비즈니스 규모가 작을 때는 몇몇이 ‘콩 놔라 팥 놔라’하면서 책임 경영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면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미국 대기업들이 전문 경영인을 두고 이사들은 일단 그를 임명해 책임을 맡긴 후에는 임기 끝까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 길이 장기적인 기업 발전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전통적으로 동업에 약하다. 더군다나 민주적으로 회의를 해 타협점을 찾고 의견을 수렴하는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다. 한미 은행이 겪고 있는 내홍은 한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멍가게에서 출발해 중소기업을 거쳐 대기업으로 가는 모든 한인 업소가 치러야 할 홍역이다.
한미 은행 이사들은 “우리가 잘못한 게 뭐 있냐”며 주위의 고언에 기분 나빠할 지 모른다. 박창규 이사장은 “은행 업무를 보고 받고 감독하는 것은 이사의 고유 권한이자 의무”라며 “그것을 놓고 ‘입김이 강하다’느니 ‘월권’이니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이어 “재신임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는 데 사표를 반려할 생 각은 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본인이 딴 일을 하겠다고 나가는데 왜 말리느냐”고 답했다.
그러나 명색이 한인 최대라는 은행 행장들이 하나 같이 섭섭한 마음을 품고 옷을 벗는 것은 이사 본인은 물론 은행 이미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미 은행 이사들은 이번 육 행장 사임을 계기로 스스로의 마음가짐과 언행이 과연 은행 발전을 위해 최선이었는가를 한번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민 경훈 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